역사적 인물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 화려함 뒤에 숨겨진 삶과 죽음

노마 진 베이커(Norma Jeane Baker, 1926~1962), 즉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는 미국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배우이자 가수입니다. 그녀의 화려한 삶과 갑작스러운 죽음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과 떨림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잡지 표지를 장식하던 시절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 화려함 뒤에 숨겨진 삶과 죽음

마릴린 먼로는 본명 노마 진 베이커로, 1926년 6월 1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글래디스 펄 먼로(Gladys Pearl Monroe)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정신 질환과 건강 문제로 오랫동안 딸을 돌볼 수 없었고, 어린 노마 진은 위탁 가정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일곱 살까지는 앨버트 볼렌더(Albert Bolender)와 아이다 볼렌더(Ida Bolender) 부부의 손에서 성장했습니다.

1933년에는 한 해 동안 어머니와 함께 지냈지만, 다음 해 어머니가 히스테리 발작으로 입원하면서 다시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이후 어머니의 절친인 그레이스 매키(Grace McKee) 부부의 집에 맡겨졌는데, 안타깝게도 그레이스의 남편이 그녀에게 성추행을 시도했습니다. 그레이스는 마릴린을 자신의 이모 집으로 보냈지만, 거기서도 사촌 잭 먼로(Jack Monroe)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등 유년 시절 내내 상처받는 경험을 반복했습니다.

1942년, 겨우 열여섯 살이던 마릴린은 무인 드론 공장에서 일하던 이웃 제임스 '짐' 도허티(James "Jim" Dougherty)와 결혼했습니다. 1943년 학업을 중단한 그녀는 남편의 공장에서 낙하산 검사 등의 일을 했습니다. 군 사진가들의 눈에 띄면서 1944년에는 미군 홍보 캠페인에 출연해 전쟁 물자 생산에 나선 여성들을 보여주는 모델로 활약했고, 이후 핀업 잡지 표지를 장식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모델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20세기 폭스와의 인연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 화려함 뒤에 숨겨진 삶과 죽음1945년 마릴린은 첫 광고 촬영을 통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에는 짐과 이혼하고 영화 배우의 꿈을 품게 됩니다. 그녀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고, 오른쪽 뺨의 주근깨는 연필로 그려 넣었습니다. 1946년 7월 26일, 20세기 폭스(20th Century Fox)와 첫 계약을 체결하며 예명 '마릴린 먼로'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여러 작품에 출연한 뒤 1948년에는 컬럼비아 픽처스(Columbia Pictures)와 몇 달간 계약을 맺었지만, 해당 영화가 실패하면서 계약이 연장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조연 역할을 얻으며 버텼지만 생활이 어려워지자 '마나 먼로(Mana Monroe)'라는 이름으로 누드 모델 활동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여러 성공작에 연달아 출연한 마릴린은 1950년 20세기 폭스와 7년짜리 계약을 따내며 입지를 굳혔습니다. 1951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대학교(UCLA)에서 미술과 문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1952년 3월에는 과거 찍은 누드 달력 사진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기자회견에서 "집세를 내기 위해 찍었다"고 솔직하게 밝힌 것이 오히려 대중의 호감을 샀고,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같은 시기 야구 전설 조 디마지오(Joe DiMaggio)와의 열애설이 불거졌습니다. 이후 몇 년간 마릴린은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는데, 특히 캐리 그랜트(Cary Grant)와 함께 출연한 《몽키 비즈니스(Monkey Business)》가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젠틀맨은 금발을 좋아한다(Gentlemen Prefer Blondes)》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How to Marry a Millionaire)》에서도 반짝이는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녀를 극찬했고, 함께 일한 동료들은 그녀를 다정하고 총명한 사람으로 기억했습니다.

인기의 정점에서

1954년 1월 14일 마릴린은 조 디마지오와 재혼하고 결혼 생활에 헌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잦은 다툼 끝에 단 8개월 만에 이혼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31일, 그녀는 자신의 제작사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스(Marilyn Monroe Productions, Inc.)'를 설립하고 뉴욕에서 새로운 배우 인생을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20세기 폭스는 그녀를 공식적으로 출연 정지시켰습니다.

1955년 마릴린은 연기 수업을 받으며 실력을 갈고닦았고,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영화 《7년의 애증(The Seven Year Itch)》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폭스는 그녀와 이전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의 새 계약을 협상하게 됩니다. 1956년 6월 2일, 마릴린은 아서 밀러와 두 번째 재혼을 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마릴린은 인기의 절정에 올랐지만, 동시에 건강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거의 매일 정신과 의사를 찾았고, 촬영장에 나가도 건강 악화로 촬영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수면제와 술에 의존하는 정도도 날로 깊어졌습니다. 1961년 1월 아서 밀러와 이혼한 뒤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3주 만에 퇴원해 캘리포니아에서 요양하며 지냈습니다. 1962년 3월 5일에는 외국계 언론으로부터 국제 스타 부문 골든글로브를 두 번째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지만, 시상식에서 취한 상태로 무대에 올라 해당 장면은 방송되지 않았습니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끝난 삶

1962년 4월, 마릴린은 폭스와의 마지막 계약 영화 촬영에 들어갔지만 촬영장에서 기절하는 등 컨디션이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5월에는 뉴욕에서 열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 축하 행사에 참석해 유명한 'Happy Birthday, Mister President'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촬영에 복귀한 그녀는 극심한 신경 과민 상태를 보였고 대사를 외우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스튜디오는 다른 배우를 섭외하고 마릴린을 상대로 소송까지 준비했지만, 공동 출연 배우 딘 마틴(Dean Martin)이 마릴린 없이는 촬영을 거부하면서 협상 끝에 그녀는 폭스와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1962년 7월 말, 마릴린은 미용사에게 유산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진정제에 의존하는 상태였고, 여러 의사들이 수면제를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1962년 8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 사이, 마릴린 먼로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검시관은 그녀의 기록에 '추정 자살(probable suicide)'이라고 적었지만, 이 국제적이고 영원한 영화 스타의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