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달레나 프리다 카르멘 칼로 칼데론(Magdalena Frida Carmen Kahlo Calderón), 흔히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뛰어난 재능과 독창적인 예술 세계로 세계 미술사에 확실한 이름을 남긴 멕시코의 화가입니다.
운명을 바꾼 사고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의 코요아칸 지역에서 마틸데 칼데론 이 곤살레스와 카를 빌헬름 칼로 부부의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여덟 살 때 소아마비(폴리오)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위축되고 발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후유증을 안았습니다.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프리다는 원래 의사가 되는 것을 꿈꿨습니다. 열여섯 살에 명문 학교인 에스쿠엘라 나시오날 프레파라토리아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1925년 9월 17일,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가 트램과 충돌하는 참사를 겪으며 복부, 다리, 골반, 척추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고, 몸에 보조기를 착용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녀는 붓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침대 위에 거울을 설치해 주었고, 프리다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모델 삼아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냈습니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증언하는 예술
여성 해방 운동에 깊은 공감을 느꼈던 프리다 칼로는 1928년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같은 해 그녀는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었고, 리베라는 젊은 여성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강렬함과 개성에 즉각 감명을 받았습니다. 1929년 8월 21일, 21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버스 사고로 인한 골반과 자궁 손상 때문에 프리다는 여러 차례 유산을 겪어야 했고, 이는 그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습니다. 꾸준히 그림을 그리며 수많은 예술가와 후원자들을 만났지만, 남편과 달리 프리다는 미국에서 빠르게 불편함을 느꼈고, 이러한 심경은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사실주의와 상징주의가 어우러진 그녀의 예술은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증언하는 동시에 멕시코의 정체성과 문화를 강력하게 옹호합니다.
1933년 디에고가 멕시코 귀환에 동의했지만, 남편의 잦은 불륜에 상처받은 프리다는 곧바로 결혼 생활을 떠났다가 1935년에 돌아왔습니다. 이후 그녀 역시 남녀를 불문하고 혼외 관계를 맺었습니다. 1937년에는 부부가 함께 맞이했던 레프 트로츠키와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건강 악화와 말년
1938년 10월 프리다 칼로는 뉴욕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이듬해에는 파리에서 전시를 열며 피카소와 칸딘스키를 만났습니다. 한편 1938년 12월 디에고와 이혼했다가 1940년에 재혼했습니다. 1943년부터 회화를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건강 악화로 제대로 걷기조차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1940년대 말에는 다시 보조기를 착용하고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수개월씩 병원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1953년에는 병상째로 옮겨진 채 자신의 전시회 오프닝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면서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1954년 7월 13일, 폐렴으로 크게 약해져 있던 프리다 칼로는 폐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47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