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루이즈 랑페리에르(Marie-Louise Lempérière)는 결혼 후 마리 루이즈 지로(Marie-Louise Giraud)가 되었으며(1903~1943), 27건의 낙태 시술을 이유로 1943년 비시(Vichy) 정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된 인물입니다.
이웃을 돕다
마리 루이즈 랑페리에는 1903년 11월 17일 프랑스 하노르망디(Haute-Normandie) 지방의 바르네빌(Barneville)에서 가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절도와 사기 혐의로 셰르부르(Cherbourg)에서 두 달간 수감되기도 했으며, 이후 하녀와 가정부를 거쳐 세탁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1930년대에는 선원 폴 지로(Paul Giraud)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셰르부르는 독일 해군의 기지가 되었고, 많은 매춘부들이 도시에 모여들었습니다. 마리 루이즈는 월세 또는 일회성 요금을 받고 이들에게 자신의 집을 빌려주었으며, 손님이 몰릴 때면 자신의 침대까지 내어주곤 했습니다.
1940년 여름 끝무렵, 이웃 주민 지젤(Gisèle)이 당시 불법 행위였던 낙태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낙태는 무사히 진행되었고, 지젤은 고마움의 표시로 마리 루이즈에게 축음기를 선물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법정 기록에 남게 된 그녀의 첫 번째 낙태 사건입니다. 다음 낙태는 1941년 5월 31일에 이루어졌는데, 마리 루이즈는 지나가던 남자와 관계하여 임신하게 된 수감자의 아내 이본느(Yvonne)의 낙태를 도왔고, 이때 1,000프랑을 받았습니다.
은밀한 낙태
전쟁으로 인한 부부의 강제 이별과 극심한 식량 부족 속에서 임신을 원치 않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은밀한 낙태 역시 급증했습니다. 이후 마리 루이즈 지로는 최소 25건의 낙태를 추가로 집도했으며, 수수료는 600프랑에서 2,000프랑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1942년 1월, 한 건의 낙태 수술이 잘못되면서 루이즈(Louise)라는 여성이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같은 해 2월 15일, 비시 정권은 낙태를 국가 안보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을 공포했습니다. 1942년 10월, 마리 루이즈는 익명의 고발 편지로 인해 체포되었습니다. 1943년 특별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녀는 부도덕한 인물로 묘사되었고, 검찰의 공소장은 비시 정권의 선전 논조를 그대로 반영하여 낙태를 국가에 대한 공격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결국 마리 루이즈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필리프 페탱(Pétain) 원수는 그녀의 사면을 거부했습니다.
마리 루이즈 지로는 1943년 7월 30일 파리 라 로켓(La Roquette) 감옥 안뜰에서 단두대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이유로 비시 정권에 의해 처형된 유일한 여성이며, 같은 해 '천사 제작자(angel maker)'로 불린 또 한 명의 여성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1988년, 프랑스의 거장 감독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은 마리 루이즈 지로의 이야기를 영화 <여자의 일>(Une affaire de femmes)로 각색하며 그녀의 비극적 삶을 스크린에 담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