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지트칼라샤(Zitkala-Ša), 아메리카 원주민 작가이자 인권 운동가

지트칼라샤(Zitkala-Ša, 1876~1938)는 선교사들이 붙여준 이름인 거트루드 시먼스 보닌(Gertrude Simmons Bonnin)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수우족(Sioux) 출신의 작가이자 편집자, 음악가, 그리고 활동가였습니다. 그녀는 저서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나아가 최초의 아메리카 원주민 오페라를 집필했고, 시민권을 위한 투쟁 단체인 '미국 인디언 전국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American Indians)'를 설립했습니다.

붉은 새

지트칼라샤(Zitkala-Ša), 아메리카 원주민 작가이자 인권 운동가'붉은 새(Red Bird)'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지트칼라샤는 1876년 2월 22일 사우스다코타주의 보호구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럽계 미국인인 아버지는 그녀가 매우 어릴 때 가족을 버렸고, 그녀는 어머니 엘런 시먼스(원주민 이름 타테 이요히윈, Taté Iyòhiwin) 밑에서 자랐습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선교사들은 보호구역의 아이들을 퀘이커 교도가 운영하는 학교인 화이트 수공 노동학교(White's Manual Labor Institute)로 데려갔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3년을 보냈으며, 특히 퀘이커 종교를 강요받거나 긴 머리카락을 잘리게 되었을 때 자신의 문화와 뿌리와의 잔혹한 단절을 깊은 고통으로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쓰기,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는 과정 자체는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1887년 지트칼라샤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보호구역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수우족의 전통을 그리워하면서도 더 이상 그 전통에 완전히 맞춰갈 수 없었고, 보호구역의 많은 사람들이 지배적인 백인 문화에 순응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4년 후 열다섯 살이 된 그녀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다시 화이트 수공 노동학교로 돌아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이후 그곳에서 직접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95년에 졸업했습니다. 그 후 인디애나주의 퀘이커 계열 학교인 얼햄 칼리지(Earlham College)로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갔으며, 이 시기에 아메리카 원주민 전설을 수집하고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졸업 전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문화 동화에 맞서다

1899년 지트칼라샤는 펜실베이니아주 칼라일 인디언 산업학교(Carlisle Indian Industrial School)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 처우에 관한 논의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1900년에는 학교 오케스트라와 함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같은 해부터 여러 신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학교 창립자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그녀는 학교의 문화 동화 정책과 백인 문화의 강요된 지배를 학교 책임자의 탓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1901년, 학교에서 정체성 상실을 느끼는 젊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글을 발표한 뒤 그녀는 해고되었습니다. 보호구역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와 오빠에 대한 걱정은 그녀가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양 춤

이후 지트칼라샤는 출판사 긴 앤 컴퍼니(Ginn and Company)의 의뢰로 아메리카 원주민 이야기를 수집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사우스다코타주의 다른 보호구역에 있는 인디언 사무국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곳에서 혼혈(Métis) 출신인 레이먼드 보닌(Raymond Bonnin)을 만났고, 그는 다음 해 그녀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레이먼드는 곧 유타주의 다른 보호구역으로 전근되었고, 부부는 유테족(Ute)과 함께 14년간 그곳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레이먼드 오하야 보닌(Raymond Ohiya Bonnin)이 태어났습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작곡가 윌리엄 F. 핸슨(William F. Hanson)을 만나 오페라 '태양 춤(The Sun Dance)'의 음악 작업을 함께 진행했으며, 대본과 노래는 그녀가 직접 썼습니다. 이 오페라는 1913년 보호구역의 유테족들이 공연하며 처음 선보였고, 아메리카 원주민이 쓴 최초의 오페라로서 훌륭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 매거진

1916년 지트칼라샤는 남편과 함께 워싱턴 D.C.로 이주했습니다. 그녀는 이후 훨씬 정치적인 글쓰기에 몰두했는데, 아메리카 원주민의 처우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 그리고 자신의 문화와 강요된 지배적 백인 문화 사이에서 젊은 시절 겪었던 갈등에 대해서도 집필했습니다. 문학과 정치 에세이 사이에 위치한 그녀의 글은 전통과 동화 사이의 긴장감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그녀는 회원으로 활동하던 '미국 인디언 협회(Society of American Indians)'의 기관지인 '아메리칸 인디언 매거진(American Indian Magazine)'을 편집하고 기고했습니다. 이 협회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시민권과 시민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인디언 사무국과 자주 접촉했지만, 그곳에 만연한 부패와 원주민 언어 사용 금지와 같은 관행에 대해 점점 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1923년 그녀는 찰스 H. 파벤스(Charles H. Fabens)와 함께 『오클라호마의 가난한 부유 인디언들: 다섯 문명 부족에 대한 횡령과 착취의 난무—합법화된 강탈(Oklahoma's Poor Rich Indians: An Orgy of Graft and Exploitation of the Five Civilized Tribes—Legalized Robbery)』이라는 글을 공동 집필했습니다. 이 글은 오클라호마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의 토지를 독점하려 했던 여러 조직의 사기 행위와 범죄를 고발한 내용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글은 1934년 미국 의회에서 '인디언 재조직법(Indian Reorganization Act)'이 통과되는 데 기여했으며, 이 법은 해당 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미국 인디언 전국 협의회

1926년 지트칼라샤는 남편과 함께 '미국 인디언 전국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American Indians)'를 설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미국 내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하나로 묶어 투표권을 포함한 완전한 시민권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협회는 또한 의료와 교육에 대한 더 나은 접근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지트칼라샤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협회 회장을 맡아 조직을 관리하고 기금을 모금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에 대해 정기적으로 연설했습니다. 그녀는 여성 권리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지트칼라샤는 1938년 1월 26일 워싱턴에서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거트루드 시먼스 보닌이라는 이름으로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