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리 무타 마타이(1940~2011)는 지속 가능한 개발과 평화를 위한 정치적 헌신으로 잘 알려진 케냐의 과학자입니다. 그녀는 200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프리카 여성이기도 합니다.
학업 재능이 뛰어난 소녀

왕가리 무타 마타이는 1940년 4월 1일 케냐 중부 고원지대의 니에리(Nyeri) 근처 이히테(Ihithe)에서 태어났습니다. 케냐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키쿠유족 출신 농부였던 부모는 그녀 이후 다섯 명의 자녀를 더 두었습니다.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가정이었기에, 당시 여아에게 드물었던 학교 교육의 기회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왕가리는 이히테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리무루(Limuru)에 있는 여학교인 로레토 수녀원(Loreto Convent)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뛰어난 지능과 학업 능력을 보여준 왕가리는 1959년 교수들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 장학금을 취득했습니다. 그녀는 캔자스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1964년), 이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흑인 미국인들이 인종 차별에 맞서 벌인 투쟁을 직접 목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린벨트 운동의 창설
1966년, 왕가리 무타 마타이는 잠시 독일로 건너가 뮌헨 대학교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케냐 독립 3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수의학 연구 조교로 일하기 시작했고, 1971년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수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는데, 케냐 최초의 흑인 여성 교수였으며, 나중에는 단과대학 학장으로도 임명되었습니다. 결혼하여 워웨루(Waweru), 완지라(Wanjira), 무타(Muta)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왕가리는 여성 인권 문제뿐 아니라 환경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977년 지구의 날, 그녀는 케냐에서 환경 보호 활동을 하던 여성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일곱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인권 존중, 좋은 통치, 민주주의를 증진한다"는 목표 아래 그린벨트 운동(Green Belt Movement)을 창설했습니다. 처음에는 황폐해진 지역의 조림 사업에 참여하는 여성들만 모임에 있었지만, 점차 남성들에게도 문호를 열었습니다. 창설 이후 이 운동을 통해 심어진 나무는 3천만 그루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왕가리는 '나무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케냐 전국 여성 협의회 '마엔델레오 야 와나와케(Maendeleo ya Wanawake)'의 의장직도 맡았습니다.
정치 활동과 헌신
1979년, 왕가리 무타 마타이는 남편과 이혼하게 되었고, 이혼 소송은 법정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판사는 "그녀의 성격이 너무 강해서 통제할 수 없다"며 남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에 왕가리는 언론을 통해 "그 판사는 부패했거나 무능하다"고 밝혔다가 며칠간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녀가 몸담았던 대학은 그녀를 해고하면서 왕가리의 대학 경력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가 대통령에 오른 후, 왕가리는 그의 정책과 정권에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시위 도중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고, 여러 번 감옥살이를 겪기도 했습니다. 1997년에는 케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자신이 속한 정당이 그녀의 후보 등록을 철회해 버렸습니다. 1990년대 말에는 나이로비 한 공원 한가운데에 60층짜리 고층 빌딩을 짓는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고, 이 건축물로 인해 많은 나무가 베어져야 한다는 점을 들어 성공적으로 저지해 냈습니다. 그녀는 해당 프로젝트에서 후원자들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경찰이 그녀의 협회 사무실을 폭력적으로 강제 퇴거시키면서 잠시 탄자니아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정치와 환경을 위한 그녀의 헌신은 더 많은 폭력을 불러왔고, 시위 이후 병원 신세를 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왕가리는 민주주의와 환경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웠습니다.
2002년 다니엘 아랍 모이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왕가리는 환경·천연자원·야생동물 차관보로 임명되어 2005년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녹색당 '마징기라(Mazingira)'를 창당했고, 2003년 케냐 의회에 당선되었습니다. 같은 해, 에이즈에 대해 "어떤 과학자가 생물전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후 그녀는 이 발언에 대해 오해받았다고 해명했습니다.
2004년, 민주주의와 환경을 위한 그녀의 공헌을 인정받아 왕가리 무타 마타이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프리카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2011년 9월 25일 암 투병 끝에 나이로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