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엘리자베스 캐틀렛(Elizabeth Catlett): 흑인 여성의 삶을 새긴 헌신적 예술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각가이자 화가 엘리자베스 캐틀렛(1915~2012)은 추상과 구상, 아프리카와 멕시코의 영향을 하나로 융합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녀는 예술을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삼고자 했으며, 특히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들의 삶에 주목했습니다.

노예의 후손

1915년 4월 15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캐틀렛은 세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부모는 모두 교육계에서 일했지만, 그녀는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여러 직업을 병행하며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로부터 해방된 노예의 후손이었습니다. 불과 50년 전에 폐지된 노예제의 기억은 사람들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할머니는 아프리카에서의 포획, 대서양 횡단의 비인간적인 항해, 플랜테이션에서의 노예 생활의 고통을 손주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미술 석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흑인 여성

아버지가 남긴 나무 새 조각에 매료된 엘리자베스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노예제 폐지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의 후손에게 미술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원 끝에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Carnegie Institute of Technology)에 합격했지만, 학교 측은 그녀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워싱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육기관인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에서 학부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화가 로이스 메일루 존스(Lois Mailou Jones)와 사상가 앨런 로크(Alain Locke)에게 배웠고, 1937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이후 어머니의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으로 이주해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지만, 흑인 교사라는 이유로 낮은 급여를 받았고 동일 임금을 요구하는 그녀의 노력은 번번이 무산되면서 크게 좌절했습니다.

명화 <아메리칸 고딕>(American Gothic)의 작가로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 그랜트 우드(Grant Wood)의 작품을 접한 엘리자베스는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우드에게서 조각과 회화를 배웠고, 리소그래피 제작과 목재·돌·점토·청동을 다루는 기법을 익혔습니다. 스승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에서 영감을 얻으라고 격려했고, 이에 엘리자베스는 예술 속에 미국 흑인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을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 그녀는 아이오와 대학교 최초의 미술 석사(MFA) 졸업생 3명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 학위를 받은 최초의 흑인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교수이자 평생 학생

졸업 후 엘리자베스 캐틀렛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해 딜러드 대학교(Dillard University)에서 가르치는 한편 꾸준히 연수를 이어갔습니다. 여름방학에는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도자 예술을,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커뮤니티 아트센터(South Side Community Art Center)에서 리소그래피를 공부했습니다. 바로 이 도시에서 화가 찰스 윌버트 화이트(Charles Wilbert White)를 만나 1941년 결혼했습니다.

부부는 뉴욕으로 이주했고, 엘리자베스는 교사로 일하면서 예술 역량을 계속 다듬었습니다.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도 거쳐 간 아트 스튜던츠 리그 오브 뉴욕(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는 러시아 출신 조각가 오시프 자드킨(Ossip Zadkine)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는데, 자드킨은 구상 작업에 추상적 요소를 혼합하도록 그녀를 이끈 인물입니다. 뉴욕 시절 부부는 작가 그웬돌린 베넷(Gwendolyn Bennett), 활동가이자 지식인 W. E. B. 듀보이스(W. E. B. Du Bois) 등 흑인 커뮤니티의 수많은 예술가·지식인들과 교류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삶

1946년 엘리자베스 캐틀렛은 로즌왈드 재단(Rosenwald Fund) 장학금을 받아 남편과 함께 멕시코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 정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찰스와 이혼했습니다. 예술을 투쟁의 도구로 만들겠다는 확고한 결심 아래, 그녀는 예술로 사회 문제를 알리고 발전시키는 집단 '타예르 데 그라피카 포풀라르(Taller de Gráfica Popular, 민중 판화 공방)'에 합류했습니다. 매우 생산적인 이 공방은 고도로 정치화된 예술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타예르에서 엘리자베스는 화가 프란시스코 모라(Francisco Mora)를 만나 곧 재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프란시스코, 후안, 데이비드 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멕시코에서도 엘리자베스는 배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립회화조각판화학교 '라 에스메랄다(Escuela Nacional de Pintura, Escultura y Grabado "La Esmeralda")'에서 목각과 도자기를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교사가 되기 위해 미술을 공부했지만, 점점 예술 자체에 더 깊이 몰입했고 그 작품에는 멕시코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멕시코 체류 기간에는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도 만났습니다.

타예르 회원들의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 활동, 그리고 멕시코시티 철도 파운동 당시 그녀 자신의 참여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미국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결국 미국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녀는 병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1962년 그녀는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멕시코 국적을 선택했으며, 미국 국적을 되찾은 것은 2002년이 되어서였습니다.

헌신적인 예술

"나에게 예술은 우리 민족 안에 있는 필연에서 나와야 한다. 어떤 질문에 답해야 하고, 누군가를 깨워야 하며, 올바른 방향, 즉 우리의 해방을 향해 나아가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미학을 넘어 엘리자베스 캐틀렛은 예술을 자신의 투쟁을 표현하고, 사회의 인식을 바꾸고, 공동체에 영감과 힘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여겼습니다. 1966년까지 함께한 타예르에서 활동하면서 이 신념은 그녀의 예술에 더욱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페미니스트이자 시민권 운동가였던 그녀는 특히 여성 롤모델의 부재를 메우는 데 힘썼습니다.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앤절라 데이비스(Angela Davis), 필리스 휘틀리(Phillis Wheatley)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인물들을 담은 리소그래프를 제작했고, 새크라멘토에서는 활동가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의 대형 조각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사실주의적이지만 때로 추상적 요소를 포함하는 엘리자베스의 조각과 리소그래프는 아프리카와 멕시코의 미학을 결합합니다. 역사적 인물을 넘어 그녀의 작품은 모성, 사회적 불의, 인간의 조건, 흑인 여성의 강인함 같은 보편적 주제를 탐구합니다.

그녀의 헌신적인 예술은 페미니즘 및 반인종차별 운동의 주목을 받았고, 주로 미국에서 점점 더 많은 전시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생전에 엘리자베스는 5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으며, 경력 내내 수많은 상과 영예를 안았습니다.

말년

교직에서 은퇴한 후 엘리자베스 캐틀렛은 남편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 작업과 헌신적인 작품 제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7년 카네기 멜론 대학교(Carnegie Mellon University) 총장 재레드 리 코혼(Jared Leigh Cohon)은 엘리자베스가 젊은 시절 자신의 학교 입학을 인종 차별로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그는 그녀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캠퍼스에서 그녀의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늦었지만 의미 있는 사과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캐틀렛은 2012년 4월,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흑인 여성의 존엄과 저항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