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제인 애덤스: 헐 하우스를 연 사회복지의 개척자이자 평화 운동가

제인 애덤스(Jane Addams, 1860~1935)는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미국 사회복지 분야의 개척자이자 창시자로 꼽힌다. 그녀는 사회적 다양성, 공중 보건,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여성 참정권을 위한 헌신적인 활동으로 이름을 남겼다.

질병과 상실로 얼룩진 유년기

제인 애덤스: 헐 하우스를 연 사회복지의 개척자이자 평화 운동가1860년 9월 6일, 제인 애덤스는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저명하고 부유한 농장주 존 휴이 애덤스와 사라 애덤스 부부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유년기는 두 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과 이어진 질병으로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네 살 되던 해 제인은 골결핵에 걸려 척추가 변형되었고, 평생 걸음걸이가 불편한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어린 제인은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것이 힘들어졌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다. 유년기는 가족의 죽음으로 더욱 무거워졌다. 형제자매 셋은 유아기에, 한 명은 열여섯 살에 세상을 떠나 제인이 여덟 살이던 무렵에는 애덤스가의 자녀 중 넷만 남아 있었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

제인은 독서와 공부에 몰두했고, 특히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을 꿈꾸었다.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아버지의 격려 속에 록퍼드 여성신학교(Rockford Female Seminary)에 진학했고, 이곳에서 훗날 첫 연인이 되는 엘런 스타(Ellen Starr)를 만났다. 1881년 제인은 졸업했지만, 같은 해 아버지 존이 충수염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제인은 가족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이주해 의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건강 문제와 신경쇠약 때문에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일리노이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해 반드시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공부를 접은 뒤 긴 유럽 여행을 떠났다. 우울증과 싸우는 동안에도 책은 그녀의 활력과 영감의 원천이었는데, 특히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큰 힘을 얻었다. 1886년에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시카고의 셋틀먼트 하우스, 헐 하우스

영국의 사회센터 토인비 홀(Toynbee Hall)을 방문한 뒤, 제인 애덤스는 엘런과 함께 서로 다른 사회 계층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연대 공동체, 이른바 '셋틀먼트 하우스'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1889년, 두 사람은 시카고에 미국 최초의 셋틀먼트 하우스인 헐 하우스(Hull House)를 설립했다. 이곳은 사회적 다양성과 이웃 공동체, 사회 조사·분석·토론을 지향하는 시설이었다.

초기에는 제인이 건물 개보수와 센터 운영에 드는 비용 대부분을 감당했지만, 이내 후원자들이 지원에 나섰다. 그중에는 메리 로젯 스미스(Mary Rozet Smith)도 있었는데, 그녀는 제인의 평생의 동반자이자 커다란 사랑이 되어 40년 뒤 제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남겨진 편지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의지하며 한 부부처럼 여기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제인과 엘런은 이 집의 첫 거주민이었다. 헐 하우스에는 이후 스물다섯 명의 여성들이 함께 살게 되었고, 매주 약 2천 명이 이곳을 찾았다. 센터 안에는 성인 야간학교, 어린이 클럽, 공공 급식소, 미술관, 목욕탕, 음악학교, 연극 모임, 도서관 등이 들어섰다. 당시 이 지역에 수많이 거주하던 유럽 이민자들을 위해 마련된 헐 하우스는 사회 서비스, 문화 행사,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제인에게 예술 프로그램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그녀는 예술을 생각과 다양성, 상호작용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여겼다. 제인과 엘런은 셋틀먼트 하우스를 위한 세 가지 윤리 원칙, 즉 본보기를 통한 배움, 협력, 평등주의적 사회 민주주의를 정립했다.

'쓰레기 전쟁'

제인 애덤스: 헐 하우스를 연 사회복지의 개척자이자 평화 운동가헐 하우스의 예술 프로그램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센터는 이내 이웃들의 당면한 필요, 즉 육아, 교육, 위생 환경 개선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헐 하우스는 새로운 통계 기법을 활용해 과밀 현상, 문해율, 교육 접근성, 유아 사망률, 아동 노동, 공장의 근로 환경, 전염병 등을 연구하는 거점이 되었다.

장티푸스의 피해가 주로 노동 빈곤층에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한 제인 애덤스는 도시 당국의 부패에 맞서 싸워 보다 공정한 공공 서비스 배분을 이끌어냈다. 그녀는 여성들이 가정을 넘어 지역 사회와 도시의 문제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가정을 잘 꾸릴 역량을 지닌 여성이라면 그 역할을 동네와 도시로 확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1894년 제인은 시카고 최초의 여성 위생 검사관으로 임명되며 '쓰레기 전쟁'에 나섰다. 헐 하우스의 여성들과 함께 단 1년 만에 위생·보건 규정 위반 사례 1천 건을 시의회에 고발했고, 쓰레기 수거의 개선은 질병 퇴치로 이어졌다.

평화와 사회 정의를 위한 헌신

현장 활동과 병행해 제인은 1902년 『민주주의와 사회윤리(Democracy and Social Ethics)』 등 에세이를 발표했고, 전국 곳곳에서 강연을 이어갔다. 여러 대학이 종신 교직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번번이 거절했다. 고등교육을 받을 형편이 되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며, 대학이 자신의 정치 활동을 통제하게 두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인은 수많은 평화 운동에 몸을 담았다. 민주주의, 사회 정의, 평화는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확신 아래, 그녀는 전쟁을 하나의 재앙으로 규정하며 어떤 전쟁도 굳게 반대했다. 1898년에는 미국의 필리핀 병합에 반대하며 반제국주의 연맹(Anti-Imperialist League)에 가입했고, 1907년에는 세계 평화의 과정에 사회 정의 개념을 담아낸 저서 『새로운 평화의 이상(Newer Ideals of Peace)』을 출간했다. 1915년에는 여성평화당(Woman's Peace Party)에 합류해 당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여성대회의 의장을 맡고,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전쟁의 출구를 찾는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미국이 참전하면서 그녀의 평화주의 입장은 강한 비판에 직면했고 비애국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이후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WILPF)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20년대에는 연맹과 함께 독가스와 전쟁 금지를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1931년, 제인 애덤스는 사회 활동과 평화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수상은 거의 만장일치로 환영받았으며, 그녀는 상금을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에 기부했다.

제인 애덤스는 1935년 5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헐 하우스와 평화 운동 속에 남긴 그녀의 사상과 실천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미국은 물론 국제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