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무정부주의 페미니스트 이토 노에: 억압에 맞선 짧고 뜨거운 삶

20세기 일본의 페미니스트이자 무정부주의자, 작가였던 이토 노에(伊藤野枝, 1895~1923)는 여성이 겪는 불평등을 폭로하는 데 헌신한 페미니즘 잡지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강요된 결혼

무정부주의 페미니스트 이토 노에: 억압에 맞선 짧고 뜨거운 삶이토 노에는 1895년 1월 21일 일본 후쿠오카 인근 규슈 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밭에서 일했고 아버지는 기와 공장에서 일했다. 여덟 살에 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빠르게 남다른 학업 재능을 드러냈다. 한동안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나가사키에 사는 숙부 집에서 지내며 교육을 이어받았다.

열네 살에 잠시 부모 곁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계를 돕기 위해 우체국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학업을 계속하고 싶었던 그녀는 도쿄로 이주한 숙부에게 자신의 뜻을 간청했고, 마침내 도쿄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여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철학, 문학, 영어를 공부했으며 1912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이토 노에는 후쿠타로라는 남자와 결혼을 강요당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 남자가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랐던 그녀는 대륙에 도착하면 곧장 그를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혼 직후 이토 노에는 집을 뛰쳐나가 전 영어 선생님이었던 쓰지 준(辻潤)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그의 도움과 숙부의 지원으로 이혼에 성공한 그녀는 쓰지 준과 연인 관계가 되어 1914년과 1915년에 두 아들을 낳았다.

페미니즘 잡지 『세이토(青鞜)』

이토 노에는 히라츠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를 비롯한 다섯 명의 여성이 몇 해 전 창간한 문예지 『세이토』의 편집진에 합류했다. "여성이 쓰고 여성을 위해 쓰는" 페미니즘 잡지 『세이토』는 여성이 겪는 불평등을 고발하며 매춘, 모성, 낙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이토 노에는 단편소설, 시, 에세이를 발표하며 특히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강제 결혼 제도를 비판했다. 자유로운 연애 관계를 살아가던 젊은 여성인 그녀는 수많은 비난과 공격의 표적이 되었지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울러 그녀는 무정부주의 페미니스트 엠마 골드먼의 저작 번역에도 힘썼으며, 『무정부주의와 기타 에세이(Anarchism and Other Essays)』를 통해 무정부주의를 깊이 알게 되었다.

1915년 1월, 이토 노에는 잡지의 주도권을 넘겨받았지만 여러 동료들이 잇달아 떠나면서 점차 고립되어 갔다. 부당함을 고발하는 데 변함없이 헌신했던 그녀는 국가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농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운동가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와 가까워졌다. 1916년, 이토 노에는 『세이토』 발행을 접고 쓰지 준을 떠나 이미 아내와 다른 연인까지 둔 오스기 사카에와 연인 관계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의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연애를 지지했으며 경제적 독립과 상대방의 자유 존중 등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그러나 오스기 사카에의 애인은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해 연인의 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고, 친척을 보내 이토 노에를 구타하게 했다. 이 사건은 거대한 스캔들로 번졌고 오스기 사카에의 아내는 이혼을 택했다. 이후 두 사람은 극빈 속에서 함께 살며 1917년에 딸을 낳았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에세이를 집필하고 페미니즘·무정부주의 성향의 잡지를 발행했다.

간토 대지진과 비극적 최후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간토 평야(혼슈, 일본 본토)를 강타해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여러 도시가 지진 자체와 화재, 그리고 근처에서 불어닥친 태풍이 일으킨 강풍으로 초토화되었다. 혼란이 극에 달한 가운데 조선인이 이 상황을 틈타 약탈을 벌인다는 유언비어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윽고 조선인을 향한 폭력과 린치의 물결이 시작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소란 속에서 군헌병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1923년 9월 16일, 이토 노에와 오스기 사카에, 그리고 여섯 살배기 조카가 함께 체포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중위가 이끄는 분대에 의해 교살되거나 구타당해 사망했다. 이름난 두 활동가와 어린아이가 학살당한 이 사건,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은 일본 전역에 분노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그들의 동료 두 사람이 아마카스 마사히코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