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 샤라위, 이집트 페미니즘의 개척자
후다 샤라위(Huda Sharawi, 1879~1947)는 이집트 페미니즘의 선구자입니다. 본명은 누르 알후다 술탄(Nur al-Huda Sultan)으로, 결혼을 통해 '샤라위'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강요된 결혼
노예 출신인 어머니 이크발과 하원 의장 무함마드 술탄 사이에서 태어난 후다는 1879년 6월 23일,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45km 떨어진 상이집트의 도시 미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른 아내가 함께 운영하는 하렘에서 보내졌습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후다와 남동생 우마르에게는 사촌이자 정치인인 알리 샤라위가 후견인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유서 깊은 가문의 딸로 자란 그녀는 피아노와 프랑스어를 배우고 꾸란 공부를 했지만, 정작 모국어인 아랍어를 배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인 가정교사에게 배운 프랑스어가 그녀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후다는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알리 샤라위와 혼약을 맺게 됩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고 이미 자신보다 나이 많은 딸들을 둔 결혼한 사촌을 부모 같은 존재로 여기며 거부했지만, 이 결혼이 아버지의 유산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고 어머니에게 피해를 준다는 비난까지 받으며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이크발은 일부일처제 혼인 계약을 확보해 주었고, 알리는 첫 번째 아내와 갈라선 뒤 열세 살의 후다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후다는 친정을 떠나지 않았고, 알리는 전처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점진적인 자율성의 획득
얼마 지나지 않아 후다는 혼인 계약서를 근거로 남편과 별거하며 나름의 자율성을 얻습니다. 여성들과 우정을 쌓고, 몇 차례 수업을 들으며 오페라를 관람하고 다양한 주제를 논하는 살롱에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00년, 남동생이 "누나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결혼하지 않겠다"며 압박하자, 후다는 또다시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물한 살에 알리 샤라위와 재혼하여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새 삶을 시작했고, 두 자녀를 키우며 남편과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1908년 후다는 남편과 파리로 휴가를 떠났고, 파리의 여성들의 화려한 복장에 감탄했습니다. 직접 밝은 색의 목선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로 돌아오자 다시 베일을 쓰며 생활했습니다.
곧이어 후다는 계층이나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이들에게 문을 연 진료소를 세웠고, 여기에 가사 위생과 육아를 가르치는 학교를 더했습니다. 큰 호응을 얻으면서 진료소는 병원으로 성장했고, 같은 형태의 의료 기관 네트워크가 확장되었습니다. 1917년에는 남동생 우마르가 세상을 떠났고, 이 상실은 후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녀는 훗날 "아이들을 위해서만 그를 보내고 살아남았다"고 말했습니다. 1919년에는 후다의 진료소를 후원하던 상류층 여성들이 가난한 소녀들을 위한 문맹 퇴치 및 교육 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이집트 페미니스트 연합의 탄생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알리는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내셔널리즘 정당 와프드당(Wafd) 창당에 참여했습니다. 후다 샤라위 역시 이 운동에 동참해 직접 민족주의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1920년에는 와프드 중앙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1923년 남편이 사망한 후, 후다는 이집트 페미니스트 연합(Egyptian Feminist Union)을 설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여성의 권리, 특히 교육·대학·공직에 대한 접근권을 옹호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다는 성평등 문제, 특히 조혼과 일부다처제 같은 가족 제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같은 해 로마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서 돌아온 후다는 베일을 다시 쓰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 정치적 행위는 사람들의 놀람을 불러일으켰고, 곧 그녀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후다는 페미니즘과 내셔널리즘 투쟁에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국제 회의에 참석하고 여러 협회를 후원했으며, 1925년에는 페미니즘을 공공연히 표방하는 아랍어 잡지 『이집트 여성(L'Égyptienne)』을 창간했습니다. 주필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세자 나바루이(Céza Nabaroui)가 맡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집트 여성들의 요구를 국제 페미니즘 운동과 연결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12년 뒤인 1937년, 그녀는 『이집트 여성』의 제목을 그대로 번역한 아랍어 잡지 『알미스리야(Al-Misriyah)』를 창간했지만, 내용은 달랐습니다. 이집트 페미니즘에서 출발한 그녀의 투쟁은 아랍 페미니즘, 나아가 아랍 세계의 통합이라는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1944년에는 카이로에서 페미니즘과 범아랍주의를 연결한 최초의 아랍 페미니스트 회의를 조직했습니다. 몇 달 뒤 아랍 연맹이 출범했지만 여성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후다는 이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 여러분이 서명한 그 연맹은 반쪽짜리 연맹입니다. 아랍 인구의 절반을 이룬 이들의 연맹입니다."
1947년 12월 12일, 후다 샤라위는 콜레라가 유행하던 시기에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