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아 케이타(Aoua Keïta, 1912~1980)는 말리의 페미니즘과 독립운동을 이끈 조산사이자 정치인입니다. 말리 최초로 국회의원에 선출된 여성으로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평생 여성의 권리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최초의 조산사들 중 한 명
마리암 쿨리발리(Mariam Coulibaly)와 카라모코 케이타(Karamoko Keïta)의 딸로 태어난 아우아 케이타는 1912년, 당시 프랑스령 수단이라 불리던 식민지 시대의 말리 바마코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군 출신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카라모코는 식민지 행정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라모코는 딸을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아우아는 바마코의 여학교와 메티스 학교(Foyer des Métisses)에서 수학한 뒤, 다카르의 아프리카 의약학교로 진학했습니다. 1931년, 그녀는 조산사 자격을 취득한 최초의 흑인 아프리카 여성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아우아는 처음 가오(Gao)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이후 프랑스령 수단 곳곳을 옮겨 다니며 일했습니다. 유능하고 열정적으로 의료 활동에 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원(산부인과 진료 시설) 설립을 위해 식민지 당국에 직접 나서며 적극적으로 로비를 벌였습니다.
1951년 총선과 독립운동
1935년 아우아 케이타는 다카르 학교 시절 만난 의사 다우다 디아와라(Daouda Diawara)와 결혼했습니다. 부부는 함께 시사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정치적 각성을 이루어 갔고, 1946년 새롭게 창당된 수단연합-아프리카민주연합(US-RDA)에 입당했습니다. 당시 여성은 당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언제나 대등한 존재로 대해줬다"고 아우아가 회고하는 남편 덕분에 그녀는 당 내 모든 동향을 빠짐없이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가질 수 없는 현실과 가족들의 압박 속에서 아우아와 다우다는 1949년 별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이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아우아는 오히려 독립운동에 더욱 몸을 던졌습니다. 1951년 그녀는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고 US-RDA를 대표해 총선에 나섰습니다. 투표의 정당성과 투명성을 지키고 프랑스 행정부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선거 결과에 개입하려는 프랑스 장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선 결과, US-RDA는 해당 지역에서 득표율을 무려 5배나 늘릴 수 있었습니다.
선거 이후 아우아는 '징계상의 이유'로 잠시 세네갈로 보내졌지만, 이후 바마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여성 연대를 강화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하나로 모아 처우 개선을 도모하는 '여성 노조간협의회(Mouvement intersyndical féminin)'를 창설했습니다. 그녀는 1957년 흑인 아프리카 노동자총연합 창립 대회에서 이 운동을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말리 연방의 국회의원
같은 해 아우아 케이타는 수단 노동조합 사무국에 선출되었고, 1958년에는 US-RDA 정치국에 선출된 유일한 여성이 되었습니다. 1959년 총선에서는 시카소(Sikasso) 지역구의 말리 연방 의원으로 당선되며, 이 자리에 오른 최초의 말리 여성이 되었습니다. 1960년 말리가 독립한 이후부터 1968년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그녀는 국정 전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여성 권리 신장에 평생을 바친 아우아는 특히 여성의 지위를 크게 앞당긴 말리 혼인 및 후견법(Code of Marriage and Guardianship) 제정 과정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여성의 날(JIFA)을 제안했으며, 이는 1962년 7월 31일 UN에 의해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1968년 무사 트라오레(Moussa Traoré)의 쿠데타로 정치적 지위를 잃은 그녀는 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아우아는 자서전 『아프리카의 여인 — 아우아 케이타가 스스로 들려주는 삶(Femme d'Afrique)』 집필에 몰두했고, 1975년 이를 출판했습니다. 조산사로서의 경력과 정치적 헌신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1976년 흑인 아프리카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아우아 케이타는 1979년 고국 말리로 돌아왔지만, 불과 1년 뒤인 1980년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 말리 여성들의 길을 밝히는 등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