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정치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 1916~2000)는 1960년 한 나라의 정부 수반이 된 세계 최초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스리랑카의 총리를 세 차례 역임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정부 수반
로잘린드 마하웰라텐네 쿠마리하미(Rosalind Mahawelatenne Kumarihamy)와 반스 라트와테(Barnes Ratwatte)의 딸인 시리마보 라트와테는 당시 실론(Ceylon)이라 불리던 스리랑카 남부 발랑고다(Balangoda)에서 1916년 4월 17일 태어났습니다. 귀족이자 지주 가문의 여섯 자녀 중 장녀였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녀는 콜롬보의 가톨릭 수녀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940년, 24세의 시리마보는 자신보다 열일곱 살 연상인 정치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Solomon Bandaranaike)와 결혼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수네트라(Sunethra), 찬드리카(Chandrika), 아누라(Anura) 세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통일국민당(United National Party)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솔로몬은 이후 민족주의 성향의 스리랑카 자유당(SLFP)을 창당했습니다. 1956년 SLFP가 주도하는 연합이 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솔로몬은 스리랑카 총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1959년 9월, 솔로몬은 불교 승려 탈두웨 소마라마(Talduwe Somarama)에게 총격을 당하고 다음 날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남편의 암살은 시리마보에게 큰 시련이었고, 정계에는 권력 공백이 찾아왔습니다. 정부와 당 내부의 혼란 속에 SLFP는 1960년 3월 선거에서 패배했고,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없어 안정적인 정부 구성에 실패하면서 석 달 뒤 재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무렵 주변의 설득으로 정계 입문을 결심한 시리마보는 SLFP의 당수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공약으로 선거운동을 벌인 그녀는 1960년 7월 선거에서 승리하며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습니다. 6년 뒤 인디라 간디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녀는 세계에서 유일한 여성 정부 수반이었습니다.
국유화 정책
정적들은 그녀가 남편의 죽음과 고통을 정치적 발판으로 삼았다며 "애도하는 미망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솔로몬의 뜻을 이어받아 경제 핵심 분야의 국유화 정책과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던 학교의 국영화를 추진했습니다.
당선 다음 해는 타밀 소수민족의 불복종 운동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영어 대신 싱할라어를 공용어로 삼겠다는 그녀의 정책을 차별적이라 여긴 타밀인들의 저항에 맞서 시리마보는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또한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가 긴장을 빚으면서 중국과 소련 쪽으로 외교 노선을 선회했습니다.
두 번째 집권기
1965년 총선에서 SLFP가 패배하면서 시리마보는 총리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이후 1970년, 좌파 정당들과의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그녀는 다시 정부 수반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집권 직후인 1971년에는 무장 반란에 직면했지만, 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동안 구축해온 외교적 동맹을 바탕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의 지원을 이끌어내 반란 진압에 성공했습니다.
다음 해인 1972년에는 새 헌법 제정을 주도했고, 실론은 공화국이 되며 국호를 '스리랑카'로 변경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석유 파동은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배급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비판에 점점 관용을 잃어간 시리마보는 국내 최대 신문을 국유화해 정부 기관지로 만들었고, 자신에게 불리한 언론 그룹까지 폐쇄했습니다. 여기에 부패 혐의까지 불거지면서 그녀의 인기는 급락했고, 결국 1977년 선거 패배와 함께 정부 수반 자리를 잃었습니다.
세 번째 집권기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의회 의석은 유지했지만, 1980년 1975년 예정이었던 선거를 1977년으로 연기한 것이 공권력 남용으로 지목되어 의회에서 제명되고 7년간 공직 보유가 금지되었습니다. 1986년에야 시민권을 회복했습니다. 권력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녀는 SLFP 당수직을 지키기 위해 애썼으며, 이 무렵 정계에 진출한 자녀들과도 각축을 벌였습니다. 이후 몇 년간 그녀는 여러 차례 선거에서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1994년 SLFP의 선거 승리로 딸 찬드리카가 총리에 올랐습니다. 같은 해 찬드리카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어머니를 총리로 임명했지만, 스리랑카 헌법 개정으로 총리직은 실권보다는 의전 직위에 가까운 자리가 되었습니다. 시리마보는 실질적 권력을 쥔 친딸 밑에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2000년 시리마보는 권력에서 물러났습니다. 같은 해 10월 10일, 평생 마지막 투표를 마친 뒤 선거 당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84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