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마포리 방구라(Hadja Mafory Bangoura, 1910년경~1976년)는 기니 독립 투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어업과 재봉으로 생계를 꾸리다
마포리 방구라는 1910년경, 당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속해 있던 오늘날 기니 서부 해안 근처의 웡키퐁(Wonkifong)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전통적으로 농업에 종사해 온 수수(Soussou)족 출신으로, 어부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이후 마포리는 수도 코나크리로 이주하여 결혼하고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업과 재봉 일을 병행하며 힘든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1953년 총파업
1901년부터 기니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AOF)의 일부였습니다. AOF는 모리타니, 세네갈, 오늘날의 말리, 기니, 코트디부아르, 니제르, 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 토고, 오늘날의 베냉 등 아프리카 내 8개 프랑스 식민지로 구성된 연방이었습니다. 마포리 방구라는 수많은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기니의 독립을 간절히 지지했습니다.
1953년,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아메드 세쿠 투레(Ahmed Sékou Touré)는 프랑스 정부가 해외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프랑스령 여러 식민지에서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습니다. 기니에서 파업은 무려 72일간 이어졌으며, 마포리는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여성들을 동원하며 운동의 확산에 앞장서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아프리카 민주 연합(RDA)과의 연대
파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협정이 체결된 후, 마포리 방구라는 아프리카 민주 연합(Rassemblement Démocratique Africain, RDA) 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RDA는 AOF 전역 식민지의 반식민주의 정당들이 모인 연합 조직이었습니다. 1954년 RDA 집회에서 마포리는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당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거부할 경우 부부관계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떠나라고까지 촉구했습니다. 기니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친 그녀는 동료들에게 보석과 귀중품을 팔아 당 운영 자금을 마련하자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식민 당국과 독립 운동가들 사이의 충돌이 거듭되자, 마포리는 여성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기 사용 훈련을 직접 지도했습니다. 또한 코나크리 적십자사의 책임자로서, 반식민주의 시위 과정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수습해 자신의 집에서 치료하며 헌신했습니다.
마포리의 활동과 영향력을 두려워한 식민 당국은 그녀를 향한 비방 캠페인을 벌였고, 결국 수감된 운동가들에게 반프랑스 문서를 전달했다는 혐의를 씌웠습니다. 1955년 7월, 그녀는 벌금형과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항의해 수백 명의 여성들이 무장 시위를 벌였습니다. 결국 마포리는 징역형 중 한 달만 복역한 뒤, 군중의 환호 속에 승리의 귀가를 했습니다.
독립 이후의 삶
1958년 기니는 드디어 독립을 선포했고, 아메드 세쿠 투레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기니민주당(PDG) 정치국의 일원이었던 마포리는 정부 내에서 여성 관련 여러 요직을 맡아 활약했으며, 1970년부터 1976년까지는 사회부 장관으로 재직했습니다.
마포리 방구라는 1976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용기는 오늘날까지 기니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