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통치 아래 인도의 두 가지 모습
영국 왕실의 통치 아래 인도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로, 11개의 영국 직할 주와 6개의 관구장 관할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영국에서 파견된 최고위 관리인 총독(Governor-General)이 다스리는 지역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토번 인도(Princely India)'로, 무려 566개의 토번(번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영국 출신의 부왕(Viceroy)이 통치했는데, 영국은 원래의 토번 통치자들과 종속 조약을 맺고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했습니다. 바로 이 조약을 통해 영국은 토번들 위에 자신의 패권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1947년 인도 독립법과 토번의 운명
1947년 인도 독립법에 따르면, 영국령 인도 영토는 1947년 8월 15일을 기해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두 나라로 분할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의 제8조에 따르면, 인도 내 566개 토번에 대한 영국 왕실의 주권은 폐지되고 해당 토번들은 독립 상태로 전환됩니다. 그 후 각 토번은 인도에 가입하든, 파키스탄에 가입하든, 아니면 제3의 연방을 새로 결성하거나 아예 별도의 독립 국가로 존재하는 등 자신들의 의사대로 선택할 자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같은 민족, 같은 문화, 그러나 엇갈린 기대
독립 당시 영국령 인도에는 힌두교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토번 인도의 대부분 역시 힌두 계열 국가였습니다. 즉, 영국령 인도와 토번 인도의 사람들은 민족적·문화적으로 하나로 묶일 수 있는 동질적인 존재였습니다.
인도 지도자들은 영국 정부가 권력을 인도 정부에 이양하는 과정에서 토번에 대한 영국의 패권도 자동으로 인도 정부로 넘어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토번의 통치자들은 이미 한 세기 반 가까운 세월 동안 완전한 독립을 꿈꿔 왔습니다.
잇따른 독립 선언, 커져가는 분열의 위험
영국이 토번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자, 트라반코르, 하이데라바드, 잠무 카슈미르, 마이소르, 인도르, 보팔, 나바나가르는 물론 이름조차 낯선 초소형 토번 빌라스푸르까지 완전한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4월 3일에는 봄베이에서 나렌드라 만달(Narendra Mandal) 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많은 왕들은 토번의 통치자들이 힌디 연합 국가에 편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1947년 6월 5일, 보팔과 트라반코르가 독립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하이데라바드 역시 같은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잠무 카슈미르, 인도르, 조드푸르, 돌푸르, 바라트푸르 등 여러 토번에서도 유사한 독립 선언이 잇달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처럼 토번 통치자들의 야망은 곧 신생 인도의 영토 통합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기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자유의 배는 암초에 부딪힐 것이다"
저명한 법학자이자 정치인인 테지 바하두르 사프루(Tej Bahadur Sapru)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나는 그 토번들이 놀랍다. 규모가 크든 작든, 그들이 이렇게 어리석기를, 스스로 독립할 수 있다고 믿고 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니."
당시 사람들은 불행한 운명을 걱정하며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인도 자유의 배는 반드시 토번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히고 말 것이라고. 그리고 바로 이 암초에 부딪혀 자유의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지켜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사르다르 파텔(Sardar Patel)의 어깨 위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훗날 파텔은 협상과 외교, 그리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결단까지 동원해 하이데라바드와 주나가드 등 저항하는 토번들을 차례로 인도 연방에 통합시켰으며, 이 공로로 오늘날 '인도 통합의 건축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통일된 인도는 존재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