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테니스 챔피언 앨시아 깁슨(Althea Gibson, 1927~2003)은 그랜드 슬램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선수입니다. 흔히 '그랜드 슬램 최초의 흑인 우승자'로 알려진 아서 애시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기록으로,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에 인종차별과 성차별, 갖가지 편견을 헤치고 테니스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스포츠와 함께한 어린 시절
앨시아 깁슨은 1927년 8월 25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실버에서 소작농 부부인 애니 벨과 다니엘 깁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깁슨 가족은 땅을 떠나 뉴욕 할렘으로 이주했고, 앨시아의 세 남매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깁슨 가족이 살던 거리는 낮 동안 아이들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통행이 통제되었습니다. 뉴욕에서는 테니스에서 파생된 라켓 스포츠인 패들테니스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앨시아는 이 분야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열두 살에는 뉴욕 여자 패들테니스 토너먼트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재능을 인정받은 신동
이웃들의 도움으로 테니스 클럽에 들어간 앨시아는 첫 대회인 미국 테니스 협회(ATA) 뉴욕 주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ATA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들의 테니스를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습니다. 그녀는 1944년과 1945년 ATA 전국 토너먼트를 제패했고, 1947년부터는 무려 10년 연속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남다른 재능을 지닌 소녀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오직 상대들에게만 증명하고 싶었다.”
— 타임, 1957년 8월 26일
US 오픈 무대에 서다
앨시아 깁슨의 재능과 성공은 미국 주니어 테니스 협회 창립자이자 의사인 로버트 월터 존슨의 주목을 받았고, 그는 그녀를 보호자로 삼아 이끌었습니다. 덕분에 그녀는 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더 큰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49년부터는 미국 테니스 연맹(USTA) 토너먼트에 참가했고, 같은 해 플로리다 A&M 대학교에 운동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인 US 내셔널 챔피언십(현 US 오픈)에는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규정상 인종 차별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출전 자격을 얻으려면 백인 전용 클럽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서 충분한 승수를 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명한 선수 앨리스 마블이 공개 서한으로 그녀를 지지했습니다.
“앨시아 깁슨이 현 세대 여자 선수들에게 도전이라면, 코트 위에서 그 도전을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공정한 일이다.”
이 서한과 ATA의 로비 끝에 앨시아는 1950년 US 내셔널 챔피언십 초청장을 받았고, 해당 대회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2회전에서 패배했지만,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에 이룬 출전 자체가 이미 역사였습니다. 이듬해에는 윔블던에도 최초의 흑인 선수로 참가하며 또 한 번 역사를 썼습니다.
롤랑가로스 정상에 오르다
1953년 대학을 졸업한 앨시아는 미주리주 링컨 대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일했습니다. 1955년에는 아시아 순회 시범 경기 대표단에 합류해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6주간의 순회를 유럽과 아시아의 토너먼트 시리즈로 확장했습니다. 세계 최고 선수들과 겨룬 결과, 참가한 18개 대회 중 16개에서 승리하는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1956년, 앨시아는 세계 4대 테니스 대회 중 하나인 롤랑가로스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랜드 슬램 토너먼트를 제패한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영국 선수 앤절라 벅스턴과 함께 복식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이중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앨시아 깁슨의 해'
1957년은 앨시아에게 너무나 성공적인 해여서 그녀 스스로 '앨시아 깁슨의 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윔블던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선수였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직접 트로피를 받은 최초의 챔피언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인종 차별 속에 살던 시절, 놀라운 성취였습니다.
“영국 여왕과 악수하는 것과 버스에서 '유색인석'에 앉도록 강요받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같은 해 앨시아는 호주 오픈 결승에 진출했고, 무엇보다 조국에서 열린 US 내셔널에서 우승하며 큰 의미를 남겼습니다. 호주와 윔블던 복식에서도 정상에 올랐고, US 내셔널 혼합복식 우승까지 추가했습니다. 뉴욕 시장은 그녀에게 뉴욕시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브론즈 메달리온을 수여했습니다.
선수 경력 전체로 보면, 앨시아 깁슨은 단식에서 5개, 복식에서 5개, 혼합복식에서 1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1957년과 1958년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했고, 두 해 연속 AP통신 '올해의 여자 스포츠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아마추어 경력의 끝
그러나 1958년 앨시아 깁슨은 아마추어 경력을 접습니다. 당시 권위 있는 아마추어 토너먼트에는 상금이 없었고, 챔피언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했습니다.
“테니스의 여왕인 건 물론 좋지만, 왕관은 먹을 수 없다. 국세청에 세금 신고서에 왕좌를 붙여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주인, 잡화점 주인, 세금 징수원은 다 같은 점이 있다. 그들은 현금을 좋아한다… 나는 텅 빈 은행 계좌를 다스리는 왕이고, 아마추어 테니스로 그 계좌를 채울 생각은 없다.”
— 깁슨 & 커티스, So Much to Live For(1968)
앨시아는 가수이자 색소포니스트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앨범을 녹음하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존 포드 감독의 영화 『기병대』에도 출연했습니다. 자서전을 출판하고 스포츠 해설가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래도 테니스를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았습니다. 홍보 투어와 프로 서킷의 드문 토너먼트에 참가했지만, 아마추어 테니스보다 명성과 인기가 크게 떨어지는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프로 경력에서도 차별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코트에서 이기기도 했던 백인 테니스 선수들이 제안과 초대를 받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내 승리들이 인종의 장벽을 영원히 무너뜨려 주지 않았다는 것을. 어쩌면 순진하게도 그렇게 바랐을 뿐이었다.”
1964년 골프 선수로 전향한 앨시아는 이곳에서도 호텔, 클럽, 토너먼트 등지에서 심각한 인종 차별에 직면했습니다. 세계 랭킹 27위까지 올랐지만 생계를 꾸리기는 여전히 어려워 1978년 골프 경력을 마감했습니다.
최고의 선수로 기억되다
선수 은퇴 후 앨시아 깁슨은 소외된 지역의 테니스 저변 확대를 위한 활동에 힘썼습니다. 지나 거리슨 같은 젊은 선수들을 보호자로 삼아 키워내기도 했습니다. 앨시아 깁슨은 개척자이자 위대한 챔피언으로서 테니스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2003년 9월,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다.” — 비너스·세레나 윌리엄스 자매의 전 코치 로버트 라일런드
“그녀의 성공의 길은 험난했지만, 나는 그녀가 물러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빌리 진 킹
“그런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녀의 성취가 제 성공의 토대가 되었고, 저와 세레나 그리고 앞으로 올 많은 선수들을 통해 그녀의 유산은 계속될 것입니다.” — 비너스 윌리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