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메리 필즈, '역마차 메리':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우체부

메리 필즈(Mary Fields)는 '역마차 메리(Stagecoach Mary)' 또는 '블랙 메리(Black Mary)'로도 알려진 인물로, 1832년경 태어나 1914년까지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최초로 우체부로 고용된 흑인 여성이자, 미국 우정청(United States Postal Service)에서 근무한 두 번째 여성이었습니다. 자유분방한 영혼과 강철 같은 담력을 지닌 그녀는 서부 개척 시대 한복판에서 야생적이고 험난한 땅을 역마차를 몰며 누비며 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5달러와 위스키 한 잔

메리 필즈,  역마차 메리 :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우체부메리 필즈는 1832년경 테네시주 힉먼 카운티에서 노예의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가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초기 삶에 대한 기록도 극히 드뭅니다.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될 때까지 노예였던 메리는 한동안 미시시피강을 항해하는 증기선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노예제 폐지 후에는 에드먼드 던(Edmund Dunne) 판사 밑에서 잠시 일했습니다.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했던 그녀는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고, 시가를 피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위스키를 즐겼습니다. 성격이 강해 필요하면 주저 없이 주먹을 날렸습니다. 몬태나의 술집들에서 그녀는 종종 이런 내기를 걸곤 했습니다. "5달러와 위스키 한 잔을 걸고, 어떤 카우보이든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다."

우르술라 수녀원

1883년, 에드먼드 던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메리는 그 집안의 다섯 아이들을 오하이오주 톨레도까지 데려가 그들의 이모이자 우르술라 수녀원 원장인 마리아마데우스(Mary Amadeus) 수녀에게 맡겼습니다. 메리는 이 수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 마리아마데우스 수녀는 몬태나주 세인트피터로 파견되어 아메리카 원주민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친구가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메리는 곧바로 마차에 올라타, 친구를 간호하고 회복을 돕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이후 메리는 세인트피터에 머무르며 우르술라 수녀회를 위해 일했습니다. 목공 작업은 물론 농사일, 장작 패기 등 육체적인 여러 일을 도맡았습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역이나 인근 큰 마을에서 물품을 실어 나르며 수녀원에 보급품을 공급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이러한 여정은 더위가 덜한 밤에 마차를 몰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메리는 야생 짐승은 물론 만취한 무법자나 카우보이들이 출몰하는 땅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늘 무장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밤에는 무리 지은 늑대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목숨과 화물을 모두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메리를 '화이트 크로우(White Crow, 흰 까마귀)'라고 불렀는데, 이는 검은 피부를 가졌으면서도 백인처럼 행동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강한 성격, 여기에 당대의 만연한 인종차별까지 더해져 지역 사회에서 항상 좋은 시선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학생은 작문에서 그녀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녀는 위스키를 마시고, 욕설을 하고, 공화당원이다. 그래서 천박하고 불결한 존재다."

1894년, 선교지에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메리가 단골로 드나들던 현지 술집 중 한 곳에서 한 남성 노동자가 공개적으로 그녀를 공격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급여를 많이 받는다며, 그는 메리가 급여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그녀가 흑인이라는 점, 여자라는 점, 그리고 충동적이라는 점. 이 남성은 우르술라 수녀회가 속해 있던 주교에게 직접 같은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남성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주교는 메리를 해임하기로 결정했고, 오히려 부상당한 남성의 급여를 올려주었습니다.

'역마차 메리'

마리아마데우스 수녀의 도움으로 메리는 인근 캐스케이드에 식당을 열었습니다. 식값을 낼 여유가 있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했지만, 몇 달 만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1895년, 그녀는 미국 우정청에 지원했습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가장 빠르게 준비시킨 지원자였고, 그녀는 우체부 자리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메리는 미국 우정청에서 일한 두 번째 여성이자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되었습니다.

메리는 성실히 일했습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음에도 언제나 직책에 충실했습니다. 눈이 너무 깊어 말이 다닐 수 없는 지형에서는 우편 자루를 등에 지고 스노우슈를 신고 배달을 다녔습니다. 이러한 믿음직함 덕분에 그녀는 '역마차(stagecoach)'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메리는 폭넓은 존경을 받으며 사랑받는 공인이 되었습니다. 매년 도시는 그녀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학교를 쉬게 했습니다. 몬태나가 여성의 술집 출입을 금지했을 때에도 캐스케이드 시장은 그녀만큼은 예외로 해주었습니다.

1901년,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메리는 우편 업무를 떠났습니다. 마리아마데우스 수녀의 도움으로 새로운 식당과 세탁소를 열었습니다. 어느 날, 식값을 내지 않은 채 거리를 지나가는 밥값 떼죽이를 발견한 그녀는 술집을 나가 그를 따라잡았고, 72세의 나이에 한 방의 주먹으로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동료들에게 그 행위의 만족감이 식값 몇 푼보다 훨씬 값지다고 말했습니다.

1914년, '역마차 메리' 메리 필즈는 몬태나주 그레이트폴스에서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