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우라니 룸보(Urani Rumbo): 알바니아 여성 교육과 페미니즘의 개척자

알바니아의 페미니스트이자 교사였던 우라니 룸보(Urani Rumbo, 1895~1936)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물로, 알바니아 최초의 페미니스트 단체 중 하나인 리드야 에 그루아스(Lidhja e Gruas), 즉 '여성 연합'을 창립했습니다.

격변의 시대에 자라다

우라니 룸보는 1895년 12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알바니아 남부 지로카스터르(Gjirokastër) 근처 스테고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스피로 룸보는 교사였으며, 그녀에게는 자매 에밀리와 세 형제 코르닐, 타나스, 디미터르가 있었습니다.

우라니는 알바니아가 큰 전환기를 겪던 시기에 성장했습니다. 4세기 가까이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아온 알바니아에서는 19세기에 들어 민족주의 사상이 확산되었고, 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이어지는 동시에 문화의 발전과 금지되었던 알바니아어의 재발견이라는 결실도 가져왔습니다.

우라니는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던 필리아테스(Filiates, 현재 그리스 영토)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그리스어와 알바니아어로 읽고 쓰는 능력을 기웠고, 알바니아 작가들의 작품도 폭넓게 접했습니다. 재능이 뛰어나고 조숙했던 그녀는 겨우 열다섯 살의 나이에 알바니아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첫걸음

우라니는 그리스 이오아니나(Ioannina)의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지만,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발칸 전쟁으로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쇠퇴의 길을 걷던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 발칸 국가들이 연합했고, 알바니아 역시 봉기하여 1912년 11월 28일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발칸 반도에 얽혀 있는 복잡한 민족 구성과 같은 언어권 주민들의 통합 문제로 인해 전쟁은 다음 해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우라니는 독학으로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익혔습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도크사트(Dhoksat)와 지로카스터르에서 알바니아 문학을 가르쳤으며,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1919년에는 여성 문맹 퇴치와 여성이 가사 노동에만 갇히는 현실에 맞서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리드야 에 그루아스(Lidhja e Gruas)의 창립

1920년, 우라니는 코토 호히(Koto Hoxhi)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의 이름은 알바니아어가 금지되던 시절 몰래 학생들에게 알바니아어를 가르쳤다가 보복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교사 코토 호히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로카스터르 지역 여학생들을 위한 이 학교에서 우라니는 교장을 맡았습니다. 여성의 권리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그녀는 교육こそ 아니, 교육이야말로 여성의 지위와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핵심 열쇠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같은 해, 우라니는 하시베 하르쇼바(Hashibe Harshova), 나지예 호자(Naxhije Hoxha), 제밀레 발릴리(Xhemile Balili) 등 세 명의 동료 여성과 함께 지로카스터르에서 리드야 에 그루아스(여성 연합)를 창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이후 알바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 단체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초기 알바니아어 신문 중 하나인 드리타(Drita)에 칼럼을 게재하며 여성이 겪는 차별과 뿌리 깊은 가부장적 전통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페미니스트 활동

1920년대 초, 우라니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와 드리타 등 여러 지역 신문에 기고하며 여성의 권리와 그들이 직면한 장벽, 특히 교육 분야의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동시에 여성을 위한 재봉, 자수, 농업, 음악, 원예 등 실용적인 교육 과정 프로그램도 개발했습니다.

1923년에는 여아들도 남학생과 동등하게 지로카스터르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캠페인에 앞장섰습니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강좌를 운영하는 페미니스트 단체 페르미레심(Përmirësim)('개선')을 창립했습니다.

1930년, 우라니는 코토 호히 학교 학생들에게 연극 출연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당국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결국 알바니아 연안 도시 블로러(Vlorë)로 전근되었고, 그곳에서 1936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육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1961년, 공산주의 시대에 사후 메수에 에 포푸이트(Mësuese e Popullit), 즉 '인민 교사' 메달을 추서받으며 그 공헌을 인정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