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민의 심장, 사르다르 파텔
당시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은 이미 인민의 마음속 심장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막대한 수입을 스스로 내려놓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바르돌리, 나그푸르, 보르사드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그 공로로 1924년 아메다바드 시민들은 그를 아메다바드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당시 아메다바드는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한 도시였습니다. 파텔은 시민들에게 청결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직접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도시 곳곳에 공원, 운동장, 휴게 시설을 조성하며 시민 삶의 질 향상에 힘썼습니다.
시립학교 자치권 확보를 둘러싼 대립
파텔은 시의회에서 '모든 시립학교를 정부 통제로부터 해방시키자'는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정부 통제 하에서는 교육이 오로지 정부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학교 감독관에게 서한을 보내 "이제 우리는 시립학교에 보조금을 보내지 않으며, 감독관이 검열하러 올 필요도 없다"고 명확히 통보했습니다.
이에 시 행정관은 시의회 결의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해당 결의를 철회하고, 시의회가 모든 학교를 정부에 인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맞서 시의회는 자체 학교를 한 달간 전면 폐쇄하고, 정부에 소속 교사 300명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로써 정부는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갑자기 돌려받은 300명의 교사를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부는 이 학교들의 회계 장부를 조사하기 위해 감사관을 파견했습니다. 사르다르 파텔은 단호히 답신했습니다. "우리가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는데 무엇을 조사하란 말인가?" 이는 영국 식민정부를 경악하게 만든 정면 대결이었습니다.
시의회 해산과 파텔의 강력한 반발
행정관은 시의회에 통고문을 보내 "시의회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모든 학교를 정부 관리 하에 두겠다"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정부에 아메다바드 시의회를 해산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이 권고에 따라 정부는 시의회를 정지시키고 그 운영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발라브바이는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끝까지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43개 국민학교 설립이라는 굴하지 않는 응답
모든 분쟁이 학교 문제에서 비롯된 만큼, 사르다르 파텔은 병행 교육을 위한 국민교육기관 설립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아메다바드 시민들에게 학교 설립 기부금을 호소했고, 시민들은 곧 12만 5천 루피를 성금으로 모았습니다.
사르다르 파텔은 이 기금으로 아메다바드에 무려 43개의 국민학교를 세워 정부에 단호한 대답을 보냈습니다. 2년간의 치열한 투쟁 끝에 정부는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고 시의회를 복원했습니다. 사르다르 파텔은 1928년까지 시의회 의장직을 수행하며 시민 자치와 민족 교육의 기반을 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