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론 싱(Bhairon Singh)은 라자스탄의 방대한 광물 자원이 지닌 잠재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우리에게 철도를 내주어야 한다. 우리 주는 전국의 시멘트와 대리석 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옥트로이(상품 입장세) 폐지
세 번째 집권 기간 동안 바이론 싱 셰카와트는 시(市) 관문에서 벌어지던 옥트로이 징수 과정의 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옥트로이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제9차 5개년 계획 규모의 역사적 확대
라자스탄에 승인된 제9차 5개년 계획(1997~2000년)의 규모는 제8차 5개년 계획보다 약 2.5배나 커졌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성과였습니다. 제8차 계획의 규모가 약 1,150억 루피(1만 1,500크로어)였던 반면, 제9차 계획의 규모는 약 2,740억 루피(2만 7,400크로어)에 달했습니다.
두 개 신설 현(縣) 창설
이 임기 동안 셰카와트 정부는 라자스탄에 두 개의 새로운 현을 만들었습니다. 스리간가나가르현을 분할해 스리간가나가르현과 하나망가르현을 신설했고, 사와이마드호푸르현을 분할해 사와이마드호푸르현과 카라울리현을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주 내 현의 수는 32개가 되었습니다.
문맹 퇴치 캠페인의 전례 없는 성공
셰카와트의 세 번째 정부는 주 전역에서 강력한 문맹 퇴치 캠페인을 전개해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91년 인구 조사에서 주의 문해율은 38%였으나, 이 캠페인 덕분에 2001년에는 61%로 크게 상승했습니다. 글 모르던 라자스탄이 글 읽는 라자스탄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세 번째 야당 대표
셰카와트의 세 번째 정부는 임기를 마쳤지만, 이후 1998년 열린 제11회 주의회 선거에서 BJP는 참패했습니다. BJP는 33석에 그친 반면, 인도국민회의는 150석을 거두며 압도적 승리로 집권했습니다. 셰카와트는 발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세 번째로 야당 대표가 되었습니다.
부통령 당선
2002년 바이론 싱 셰카와트는 인도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는 단판 대결에서 경쟁자 수실 쿠마르 신데를 꺾고 승리했으며, 2002년 8월 19일 인도 제11대 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평생 배움을 멈추지 않다
셰카와트는 고등학교까지의 교육만 받았지만, 배우고 읽고자 하는 갈망은 평생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보좌관들에게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노트를 준비하게 하고, 그것을 직접 공부하며 한 주제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세우곤 했습니다.
세 차례의 명예 문학 박사
안드라 대학교, 모한랄 수카디아 대학교, 마하트마 간디 카시 비드야피트(바라나시)는 셰카와트에게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오브 뭄바이는 그에게 명예 펠로우십을, 아르메니아 예레반 국립 의과대학은 의학 박사 칭호와 금메달을 수여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패배
2007년 7월 아프잘 압둘 칼람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자 셰카와트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무소속 후보로 나섰고, NDA 연립의 모든 구성 정당이 그를 지지했습니다. 상대는 UPA와 좌파 진영의 지지를 받은 라자스탄 주지사 프라티바 데비싱 파틸이었습니다. 선거 결과 프라티바 파틸이 승리했습니다. 셰카와트는 2007년 7월 21일 부통령직에서 사임했고, 이후 영원히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84세였습니다.
암 판정이라는 충격
84세의 나이에 셰카와트는 암에 걸렸습니다. 인도의 여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습니다.
카스트와 사회의 압박에 굴하지 않다
1987년 9월 4일, 루프칸와르 사티(숙부 사건)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총리는 하리데브 조시였고, 셰카와트는 영국 방문 중이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성명을 발표해 사티 사건의 책임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라지푸트 사회의 많은 이들은 이미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 입장을 밝힌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셰카와트는 자신의 원칙을 두려움 없이 관철했습니다. 그는 카스트와 사회의 눈치를 결코 보지 않았습니다. 국민회의 정부가 사티 관행을 금지하는 법률을 도입하자 셰카와트는 이를 지지했습니다. 런던에서 돌아온 그는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대담하게 공개 집회에 나서 논리로 모든 비판을 일축했습니다.
람 니와스 미르다와 닮은 얼굴
셰카와트의 얼굴은 국민회의 고위 지도자 람 니와스 미르다와 무척 닮았습니다. 사람들은 미르다를 보고 셰카와트로, 셰카와트를 보고 미르다로 착각하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셰카와트는 미르다 딸의 결혼식에 사파(두건)를 쓰고 참석했습니다. 두 사람의 머리 형태마저 거의 같았습니다. 이에 미르다는 셰카와트에게 '당신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나는 혼례당으로 갈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셰카와트는 미르다의 가족들과 함께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많은 이들이 그를 미르다로 착각해 인사를 건넸습니다. 혼례당에서 나온 미르다는 손님들이 셰카와트를 자신으로 착각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셰카와트는 웃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람 니와스 미르다이고, 이분이 바이론 싱 셰카와트입니다.'
신발 세례를 견디며 화환을 올리다
1996년 셰카와트는 행정 운영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라젠드라싱 라토드와 로히타슈와 샤르마 두 장관을 하이데라바드에 파견했습니다. 마침 당시 안드라프라데시 주총리 N. T. 라마라오가 서거했습니다. 셰카와트는 두 장관에게 정부를 대표해 라마라오의 시신에 헌화하고 돌아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두 장관이 헌화하러 가자 사람들은 그들에게 슬리퍼를 던지며 '돌아가라'고 외쳤고, 장관들은 시신에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셰카와트는 '몇 개의 신발과 슬리퍼를 맞더라도 반드시 헌화를 마치고 돌아오라'고 명했습니다. 두 장관은 다시 영전으로 향했고, 이번에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훗날 알고 보니 사람들은 라젠드라싱 라토드를, 며칠 전 장인 라마라오의 정부를 무너뜨린 N. 찬드라바부 나이두로 착각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