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된 뒤, 언론은 파텔이 이끄는 내무부가 간디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고 맹비난했다. 이 비난에 깊이 상처받은 파텔은 정부에서 사임하기로 결심한다. 그러자 네루는 "두 사람은 30년 동안 콩그레스에서 공동의 대의를 위해 함께 일해 왔으며, 간디의 죽음을 두고 서로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파텔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파텔의 사임은 무산되었지만, 그 후에도 두 사람 사이의 정치적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특히 네루가 추진한 세 가지 정책, 즉 1948년 카슈미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한 것, 1950년 중국에 맞선 티베트에 원조를 보내지 않은 것, 그리고 고아에서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는 데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파텔은 끝까지 강하게 반대했고, 이 날카로운 입장 차이는 파텔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카슈미르 문제와 관련해 네루가 파텔과 내무부 관료들을 배제하려 들자, 파텔은 더욱 강경하게 반발했다.
라젠드라 프라사드 대통령 선출을 둘러싼 갈등
1950년, 네루는 인도 초대 대통령으로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를 밀어내고 라자고팔라차리를 앉히기 위해 프라사드에게 출마 철회를 압박했다. 네루의 이러한 행보는 콩그레스 지도부를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다. 당원들은 네루가 자신의 의지를 당에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고 느꼈다. 네루는 파텔에게 라자고팔라차리의 대통령 선출에 힘을 보태 달라고 요청했지만, 파텔은 당의 뜻에 반하는 일에는 절대 협조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가 인도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콩그레스 당수 선거, 톤던 대 크리팔라니
같은 해 열린 콩그레스 당수 선거에서 네루는 푸루쇼탐 다스 톤던의 출마에 반대했다. '힌두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톤던 대신 지브람 크리팔라니를 당수로 옹립할 것을 호소하면서, 나아가 그렇지 못할 경우 스스로 사임하겠다고까지 밝혔다. 그러나 파텔은 네루의 이런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며 구자라트에서 톤던에 대한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흥미롭게도 크리팔라니는 구자라트 출신이었지만, 정작 고향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파텔은 네루의 개인적 소망이 결코 콩그레스의 법칙이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톤던이 당선되자 네루는 자신이 당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내 직위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텔이 네루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극력 만류하며 물러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