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시바지의 아우랑제브에 대한 저항: 힌두교 사원 파괴에 맞선 마라타 제국의 투쟁

1669년 4월 9일,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는 제국 내 모든 힌두교 사원과 학교를 파괴하고, 힌두교 축제를 금지하며, 힌두교도의 성지 순례를 막는 칙령을 내렸다. 새로운 힌두교 사원과 학교의 건축도 금지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수천 개의 무슬림 부대를 편성해 사원과 학교를 파괴하도록 했고, 관리들에게 파괴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명령은 북인도에서 즉시 시행되었다.

사원 파괴의 광풍

1669년 9월 4일, 카시 비슈와나트 사원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모스크가 세워졌다. 마투라의 케샤브라지 사원, 우자인, 아흐메다바드 등지의 유명 사원들이 땅에 묻혔으며, 소므나트 사원도 두 번째로 파괴되었다. 아삼, 오리사, 벵골 등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황제 산하 힌두 통치자들이 힌두교 수도원과 종교 기관, 학교에 제공하던 지원이 중단되었고, 사제들과 사원의 토지 및 영지(자기르)가 몰수되었다. 수만 개의 신상(데이티)이 훼손되고 사원들이 방화되었다.

시바지의 저항 시작

아우랑제브가 전국적으로 사원과 신상을 파괴하기 시작하자, 시바지는 평화 정책을 포기했다. 1669년 12월 14일부터 1670년 1월 11일 사이에 시바지는 무굴 진영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왕자 무아잠과 함께 아우랑가바드에 주둔하던 프라타프라오와 아난드라오가 병력을 이끌고 라이가르로 돌아왔다. 이후 시바지는 무굴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자이 싱 마하라자에게 빼앗겼던 옛 요새들을 되찾기 시작했다.

시바지의 어머니 지자바이도 힌두 백성을 억압하고 힌두 신상을 모욕하는 악왕을 징벌하라고 시바지를 독려했다. 수라트의 영국 대통령 게리는 1670년 1월 23일 자사 고위 관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종교 개혁의 정신에 영감받은 아우랑제브가 수많은 비기독교 사원을 파괴하고 많은 이들을 강제로 무슬림으로 개종시킨 것에 반발해, 반군 시바지가 다시 아우랑제브와 싸우고 있다"고 보고했다.

시인 부샨이 칭송한 시바지의 활약

시바지의 동시대 시인 부샨은 아우랑제브의 활동을 저지한 시바지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쿰바카르나 아수라 아우타리 아우랑제브
누군가 마투라를 파괴하고 알라를 부르짖네.
여신들의 도시를 파헤치고,
수만 투르크가 그곳에서 죽었네.
부샨은 카시파티 비슈와나트를 떠올리며,
그 속도를 헤아릴 수 없네.
네 바르나(계급)의 의무를 버리고 카말라 나와즈를 읽는다면,
시바가 없었다면 모두가 (이슬람을) 들었을 것이네.

싱가드 요새 탈환 (1670년 2월 4일)

어느 날 지자바이는 시바지가 싱가드 요새를 되찾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요새는 원래 비자푸르 지배하에 있다가 시바지가 차지했으나, 자이 싱과의 푸란다르 조약으로 아우랑제브에게 넘어가 아직 무굴 수중이었다. 무굴 요새지기 우다이반 라토드는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 탈환이 어려운 과제였다. 그럼에도 시바지는 어머니의 명을 따라 타나지 말수레에게 임무를 맡겼다.

타나지는 1670년 2월 4일 한밤중, 300명의 마블리 병사를 이끌고 싱가드를 공격했다. 그는 동생 수랴지와 함께 250명의 병사를 정문 쪽에 매복시키고, 자신은 일부 병사를 데리고 코끼리 도움을 받아 성벽을 넘어 성내로 들어가 성문을 열고 수랴지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랴지는 대기하던 병력을 이끌고 성내로 진입했다. 무굴 요새지기 우다이반 라토르도 병력을 이끌고 맞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타나지 말수레가 전사했다.

타나지가 쓰러지자 마블리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수랴지는 "도망치면 모두 죽는다. 출구는 막혔으니 살기 위해 싸워 이겨라"고 외쳤다. 마블리 병사들이 다시 싸우기 시작해 잠시 뒤 우다이반과 그 병사들을 모두 죽였다. 아침이 되자 요새는 마라타 수중으로 들어갔다. 수랴지는 성내 가옥에 불을 지펴 시바지에게 탈환 소식을 알렸다. 타나지 말수레의 시신이 시바지와 지자바이 앞에 놓이자, 시바지는 "요새는 얻었으나 사자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수랴지 말수레가 싱가드 요새지기로 임명되었으며, 이날을 기념해 싱가드에서 '샤우르야 디와스(용기의 날)' 축제가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푸란다르, 마훌리, 찬드와드 요새 탈환

싱가드 탈환 후 시바지는 무글로부터 요새를 탈환하는 작업을 가속화했다. 1670년 3월 8일, 마라타군은 푸란다르 요새를 공격해 탈환하고 무굴 장군 라지우딘을 사로잡았다. 마라타군은 로하가르와 로히다 요새도 점령했다. 무굴 진영은 대혼란에 빠졌고, 마라타군은 데칸 전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1670년 1월 24일자 무굴 정보 보고서에는 "시바지군이 베라르 주를 약탈 중이다. 왕실 영토에서 200만 루피를 징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라트와다 오스마나바드 지구 아우샤 요새의 영주 바르쿠르다르 칸은 황제에게 "시바지군 2만 명이 이 지역에 도착해 주를 약탈하고 물자를 모으고 있다. 그들의 진지는 요새에서 2코스(약 6km) 거리다. 시바지가 내 영지를 약탈해 생계 수단이 없다. 자비를 베풀어 돈을 좀 달라"고 호소했다.

시바지는 마훌리를 공격했다. 겁먹은 무굴 요새지기 마노하르다스 고르는 직을 사임했다. 무굴 장군 다우드 칸이 대군을 이끌고 새 요새지기를 임명했다. 다우드 칸이 일부 병력을 남기고 준나르로 향하던 중, 시바지가 기습해 그의 목을 베고 마훌리를 점령했다. 찬드와드 요새에는 막대한 무굴 국고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시바지가 공격해 모든 보물을 탈취했다. 시바지는 우즈베크 칸을 죽이고 칼얀과 비완디를 점령했다. 무굴 장군 로디 칸은 중상을 입고 도주했다. 시바지는 마테란과 카르날라 요새도 차지했다. 이렇게 시바지는 자이 싱과의 조약으로 아우랑제브에게 넘어갔던 콘칸 지역을 포함한 모든 무굴 요새를 탈환했다.

수라트 제2차 약탈 (1670년 10월 3일)

시바지는 아우랑제브를 편히 두지 않으려 다시 수라트를 공격하기로 했다. 수라트 총독이 사망했고 현재 병력이 적다는 정보를 입수한 시바지는 1670년 10월 3일, 기병 1만 5천을 이끌고 수라트에 도착했다. 그는 수라트 상인들에게 전갈을 보냈으나 아무도 만나러 오지 않았다. 이에 시바지 병사들이 시내로 진입해 약탈을 시작했다. 수라트는 3일간 약탈당했다. 영국인들은 이미 재물을 스와리 항구로 옮긴 상태였다. 시바지가 오자 영국인들은 선물 등을 바치며 그를 달랬다. 포르투갈인들도 시바지를 달래는 데 동참했다. 당시 인도의 한 무슬림 국가 술탄이 메카 순례를 마치고 수라트 항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시바지는 그도 약탈했다. 금침대를 포함해 수만 루피를 얻었다. 이번 수라트 약탈로 시바지군은 660만 루피를 챙겼고, 도시의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한편 부르한푸르에서 대규모 무굴군이 급히 수라트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바지는 약탈품을 챙겨 떠났다. 이 약탈 후 수많은 상인이 수라트를 떠나 봄베이 등지로 이주했고, 무굴은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이 항구의 파괴로 무굴 술탄국의 막대한 수입원이 끊어졌다.

다우드 칸 쿠레시와의 대치

수라트에서 귀환하던 중, 시바지는 무굴 장군 다우드 칸 쿠레시가 대군을 이끌고 길을 막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바지는 군대를 4~5개 부대로 나누고, 각 부대에 영리한 장수를 내세워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무굴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시바지 휘하 한 부대는 약탈품을 싣고 산길을 통해 라이가르로 향했다. 이 와중에 시바지는 무굴군 말 4천 필을 노획했다. 이로 인해 무굴 장군은 말만 돌려주면 전투 없이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시바지는 이를 수락했다.

무굴군에는 라이바가라는 여장수가 있었는데, 앞서 카르탈랍 알리 칸과의 전투에서 무굴 편으로 시바지와 싸운 바 있다. 그녀는 이 합의를 거부하고 시바지를 공격했다. 시바지는 라이바가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려 돌려보냈다. 무굴군은 침묵 속에 주저앉았고, 시바지는 당당히 라이가르로 돌아갔다.

베라르와 칸데시 원정

수라트 약탈 후 시바지는 베라르, 바글란, 칸데시도 공격해 많은 요새를 장악했다. 시바지 장군 프라타프라오 구자르는 부르한푸르 인근 무굴의 유명 요새 바하두르푸르를 약탈하고 베라르 주에 진입해 번성한 도시 카란자를 약탈했다. 여기서 약 1억 루피 상당의 재물을 획득해 푸네와 라이가르로 보냈다. 프라타프라오는 카란자의 거상들을 인질로 잡아 거액의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시바지는 군대가 지나간 모든 무굴 영토에서 차우트(수입의 1/4 세금)를 징수했다. 이로써 시바지는 남부에서 무굴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렸다.

차트라살, 시바지를 만나다

분델칸드의 라자 참파타라이는 평생 아우랑제브를 섬겼으나 아우랑제브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차트라살도 아우랑제브를 성심껏 섬기며 자이 싱군에 머물며 시바지와 여러 차례 싸웠다. 그는 시바지의 용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어느 날 차트라살은 아내와 친구들과 사냥을 핑계로 무굴 진영을 빠져나와 조용히 푸네에 도달했다. 시바지는 그를 환대하며 정치, 책략, 게릴라 전술을 가르쳐주었다. 차트라살은 시바지와 함께 아우랑제브군과 싸우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시바지는 고향 분델칸드로 돌아가 조국을 무굴로부터 해방시키라고 조언했다. 그곳에서 동포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차트라살은 이 조언이 타당하다고 여겨 따랐다. 시바지는 그에게 칼을 차여주고 손수 틸라카(이마 표시)를 찍어주었다. 차트라살은 무굴 관직을 버리고 고향 마호바로 돌아가 아우랑제브에 맞서 전쟁을 선포했다.

성자 투카람과의 만남

시바지는 마하라슈트라의 유명한 성자 투카람을 만났다. 투카람은 그에게 삼라트 구루 람다스에게 귀의해 스승으로 모시라고 권했다. "람다스는 오직 그대를 인도하기 위해 태어났다." 시바지는 투카람의 말을 따라 삼라트 구루 람다스를 만나 제자가 되었고, 람다스도 기꺼이 시바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람다스는 나가푸르 인근 람테크에 라마찬드라 사원을 지어 힌두교 신앙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마하바트 칸의 남부 진군

수라트 제2차 약탈은 아우랑제브에게 큰 도전이었다. 그는 마하바트 칸을 남부로 파견해 시바지 토벌을 명했다. 구자라트 총독 바하두르 칸을 부장으로 삼았다. 1671년 1월 10일, 마하바트 칸은 아우랑가바드에서 왕자 무아잠과 합류했다. 마하라자 자스완트 싱, 딜레르 칸, 다우드 칸 등도 여전히 남부에 있었다. 이들 장수, 총독, 왕들은 서로 질투하고 적대적이어서, 아우랑제브의 원정 진전에는 관심이 적고 연회와 사냥에만 몰두했다. 그사이 남부에 전염병이 돌아 수만 명의 사람과 동물이 죽었고, 무굴군 병사들과 수송 짐승도 대거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