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11. 살레르-물헤르 전투: 시바지의 대승과 아우랑제브의 좌절

11. 살레르-물헤르 전투: 시바지의 대승과 아우랑제브의 좌절

전투의 배경

1672년 초, 무굴 제국의 장군 딜레르 칸 휘하의 이클라스 칸이 살레르 요새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 딜레르 칸과 바하두르 칸은 마라타 세력의 중심지인 푸네를 공격해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에 시바지는 적을 푸네에서 끌어내기 위해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시바지는 자신의 장군 프라타프라오 구자르에게 살레르를 공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프라타프라오는 이클라스 칸을 맹공격해 궁지에 몰아넣었고, 이클라스 칸이 패배 직전에 처하자 딜레르 칸과 바하두르 칸은 푸네를 버리고 살레르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두 장군은 살레르와 함께 물헤르 요새마저 포위했습니다.

피로 물든 격전

시바지는 딜레르 칸과 바하두르 칸의 군대를 외부에서 공격하는 전략을 채택했고, 페슈와 모로판트와 프라타프라오 구자르가 목숨을 걸고 맞섰습니다. 전투는 극도로 참혹해졌고 피의 강이 흘러넘쳤습니다.

결국 마라타 군대는 무굴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수천 명의 무굴 병사가 전사하고 또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수천 명의 부상병이 전장을 떠났습니다. 낙타, 코끼리, 말, 당나귀, 노새 등도 대량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굴군의 막대한 보물과 군수물자, 그리고 수천 마리의 코끼리와 말, 당나귀, 노새가 시바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시바지의 승리와 관용

시바지 역시 이 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의 유년기 친구였던 수랴 라오 칸카데가 전사했고, 그의 군대도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양측 합쳐 약 1만 명이 사망하고 약 1만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시바지가 정면 대결에서 거둔 첫 번째 대승이었습니다. 무굴군은 살레르와 물헤르 두 요새에서 모두 축출되었고, 딜레르 칸은 전장에서 멀리 도주했습니다.

이 승리를 기뻐한 시바지는 백성들에게 단맛을 나누어 주고 병사들에게 상금을 하사했습니다. 특히 그는 전장에서 부상당한 양측 병사들의 상처를 치료하게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시바지의 이러한 관용적인 태도를 본 많은 무굴 병사들은 무굴군을 떠나 시바지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아우랑제브의 충격

살레르와 물헤르의 패배 소식을 들은 아우랑제브 황제는 사흘 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께서 무슬림으로부터 왕국을 빼앗아 불신자에게 주려 하는 것 같다. 이 소식을 듣기 전에 내가 죽었더라면!"이라며 탄식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아우랑제브의 젖형제인 바하두르 칸 코카가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무굴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데칸으로 가서 시바지를 공격하고 그의 기세를 꺾겠습니다." 이에 아우랑제브는 바하두르 칸 코카를 남부의 수바다르(총독)로 임명했습니다.

마하왓 칸의 최후

아우랑제브는 살레르의 참패에 대한 책임을 마하왓 칸에게 돌리며 질책의 서신을 보내고 즉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하왓 칸은 자한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 3대에 걸쳐 무굴 제국에 충성해 온 원로였고, 그의 자녀들은 황실 왕자들과 혼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산 쥐'라고 불리던 시바지에게 그토록 참패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황제가 자신을 그렇게 모욕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하왓 칸은 절망에 빠진 채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딜레르 칸과 바하두르 칸의 반박

아우랑제브는 딜레르 칸과 바하두르 칸에게도 강경한 서신을 보냈습니다. "패배의 치욕을 얼굴에 묻히기 전에 전장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너희는 겁쟁이처럼 도망쳐 목숨만 건졌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영국인, 프랑스인, 아비시니아인, 그리고 골콘다와 비자푸르의 군대까지 동원해 시바지를 포위 섬멸했어야 했다."

이에 대해 딜레르 칸과 바하두르 칸은 답신을 보냈습니다. "황제께서 기억하신다면, 이 시바지야말로 아그라의 엄중한 황실 감금에서 교묘하게 탈출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저희의 죄를 그리 가증스럽게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답변에 아우랑제브는 더욱 분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