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벨 웰스-바넷(Ida Bell Wells-Barnett, 1862~1931)은 미국의 언론인으로, 미국 민권 운동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포함한 여성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교사가 되다
이다 벨은 노예였던 엘리자베스 '리지' 워렌턴 웰스와 제임스 웰스 부부의 딸로, 1862년 7월 16일 미시시피주 홀리스프링스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지 몇 주 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여 남부 연합 지역의 노예들을 자유롭게 선포했다.
이다는 홀리스프링스에서 대학에 진학했지만, 황열병 유행으로 부모와 막내 남동생을 잃으면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남매가 위탁 가정에 보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는 교사로 일자리를 구했고, 조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철도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
1883년, 이다 B. 웰스는 세 명의 동생을 데리고 멤피스로 이주해 이모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계속 교사로 일하면서 여름방학에는 수업을 들었다. 당시 이미 그녀는 특히 여성 권리에 관해 강한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다음 해에 일어난 한 사건이 그녀를 공적인 삶으로 이끌었다.
1884년 5월 4일, 그녀가 탄 기차의 차장은 그녀에게 1등석 좌석을 떠나 이미 만원인 흡연칸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로자 파크스의 버스 저항보다 무려 71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이다는 자리를 비켜가기를 거부했고, 차장과 승객 두 명은 그녀를 기차에서 끌어내렸다. 멤피스로 돌아온 이다는 철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지만, 1885년 테네시주 최고법원이 판결을 뒤집었다.
『프리 스피치 앤 헤드라이트』
이 사건 이후 이다 B. 웰스는 흑인 교회 주간지 『더 리빙 웨이(The Living Way)』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후 매주 칼럼을 연재했다. 초등학교 교사 일을 계속하는 동안 지역 신문 『이브닝 스타(Evening Star)』에도 일자리를 얻었다. 1889년, 27세의 나이에 그녀는 시민권과 인종 차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반분리 신문 『프리 스피치 앤 헤드라이트(Free Speech and Headlight)』의 발행인 겸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같은 해, 그녀의 친구 토머스 모스가 멤피스 교외에 백인 소유 가게와 경쟁하는 잡화점 '피플스 그로서리 컴퍼니(People's Grocery Company)'를 열었다.
1892년 3월, 피플스 그로서리 컴퍼니는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백인 세 명이 총상을 입었다. 토머스 모스를 포함한 점주 세 명은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그날 밤 폭도들이 감옥을 습격해 세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친구들의 린치 소식을 접한 이다는 신문에 분노의 글을 실으며 흑인 동포들에게 멤피스를 떠날 것을 촉구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돈을 모아 이 도시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않고, 법정에서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지 않으며, 백인에게 고발당하기만 하면 우리를 끌어내 차갑게 살해합니다."
린치의 고발
실제로 6,000명의 흑인이 도시를 떠났고, 다른 이들은 항의 보이콧을 조직했다. 이다 B. 웰스는 미국 남부에서 일어나는 흑인 린치 실태에 대한 취재에 착수했다. 그녀의 첫 기사는 백인 여성과 합의된 관계를 가진 흑인 남성이 종종 강간죄로 몰려 린치를 정당화한다는 결론을 담고 있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1892년 5월 27일, 보복으로 그녀의 신문사가 파괴되었다.
이다는 뉴욕으로 옮겨 『뉴욕 에이지(New York Age)』에 린치 관련 기사를 계속 발표했다. 그녀는 유럽까지 건너가 연설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배제한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대한 보이콧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 캠페인 이후 그녀는 시카고로 이주해 『시카고 컨저베이터(Chicago Conservator)』의 편집자가 되었다.
이다는 린치에 관한 두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분석서인 『Southern Horrors: Lynch Law in All Its Phases』(1892)와 통계에 기반한 『The Red Record』(1895)가 그것이다. 이후 시카고에 정착한 그녀는 시민권 운동을 계속하며 흑인 동포들의 생활 개선에 힘썼고, 네 명의 자녀를 키웠다. 은퇴 후에는 자서전 『Crusade for Justice』 집필에 착수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다 웰스는 1931년 3월 25일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전미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 헌액되며 그 업적을 후세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