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13.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황제에게는 무려 16명의 왕비가 있었다!

13.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황제에게는 무려 16명의 왕비가 있었다!

프리트비라지 차우한(Prithviraj Chauhan)의 정복 행진이 계속될수록 그의 위광은 날로 높아졌고, 이에 힘입어 북인도 각지의 제후들은 자신들의 공주를 프리트비라지에게 시집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록마다 다른 왕비의 수

흥미로운 점은 문헌마다 프리트비라지의 왕비 수와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실제 왕비 수를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사시 『프리트비라지 비자이(Prithviraj Vijay)』 제10권 후반부에는 프리트비라지에게 많은 왕비가 있었으며, 차우한 씨족의 보석인 프리트비라지에게는 13명의 왕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일부 문헌에서는 그의 왕비가 16명이라고 전합니다.

문헌에 전해지는 16명의 왕비

일부 사료에 언급된 16명의 왕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아부의 라오 알란 파니와르의 딸 이치니 파니와르
② 만도르의 라오 나하드 프라티하르의 딸 자탄칸와르
③ 델와라의 람싱 솔랑키의 딸 프라타프칸와르
④ 나가우르의 다히마 라지푸트 출신 수라지 칸와르
⑤ 고르(Gaur) 공주 기안 칸와르
⑥ 바드구자르(Badgujar) 공주 난다 칸와르
⑦ 야다브(Yadav) 공주 파드마바티
⑧ 게홀롯(Gehlot) 공주 칸와르 데
⑨ 아메르 국왕 판잔의 공주 자스 칸와르 카치와히
⑩ 만도르의 찬드라센의 딸 찬드라칸와르 파디하르
⑪ 라토드 테즈 싱의 딸 샤시브라타
⑫ 데와스의 솔랑키 공주 찬드칸와르
⑬ 바이스(Bais) 국왕 우다이 싱의 딸 라탄칸와르
⑭ 솔랑키 공주 수라지칸와르
⑮ 프라타프 싱 마크와니
⑯ 카나우지의 공주 산요기타(Sanyogita)

물론 이 모든 이름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 일부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고로 일부 사료에서는 왕비 샤시브라타를 야다브 씨족의 딸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료에는 13명의 왕비가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잠바바티 파디하리, 파니와리 이치니, 다히야, 잘란다리, 구자리, 바드구자리, 야다브 파드마바티, 야다브 샤시브라타, 카치와히, 푼디르니, 인드라바티, 그리고 산요기타 가하드왈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에 담긴 결혼 기록

『프리트비라지 라소(Prithviraj Raso)』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는 11세에 첫 결혼을 올렸습니다. 이후 22세가 될 때까지 매년 한 명씩 결혼을 거듭했다고 전해지며, 그의 마지막 결혼 상대는 카나우지의 가하드왈 왕조 국왕 자이찬드의 딸 산요기타였습니다.

그의 첫 번째 결혼 상대는 만도르의 파디하르(Padihar) 왕의 딸 잠바바티였다고 합니다. 다만 일부 저자들이 이 파디하르 왕의 이름을 '나하드라오'라고 적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만도르·잘로르·빈말·카나우지를 다스린 프라티하르 통치자 나하드라오는 역사적으로 나가바타 2세(Nagabhatta II)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의 활동 시기는 프리트비라지 차우한보다 약 4세기나 앞선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리트비라지의 파디하르 왕비의 아버지 이름은 반드시 다른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필사본마다 다른 왕비의 이름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한 필사본에는 왕비의 이름으로 오직 잠바바티, 이치니, 야다브 샤시브라타, 한사바티, 산요기타 다섯 명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축약본에는 이치니와 산요기타 두 사람만 등장하며, 또 하나의 소형 필사본에는 산요기타의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현존하는 모든 필사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왕비의 이름은 바로 산요기타입니다.

크기와 내용이 제각각인 필사본들을 종합해 볼 때,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원본 분량은 지금보다 짧았고, 후대에 불필요한 내용이 덧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프리트비라지 라소』에는 찬드라 푼디르 지역의 공주 찬드라바티가 프리트비라지와 혼인하여 사팔다락샤(Sapadalaksha) 왕국의 후계자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지에게 푼디르 씨족 출신의 왕비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아들 이름은 '란시'가 아니라 '고빈드'였습니다.

다히야 왕비 아지야의 사랑 이야기

비카네르의 아눕 산스크리트 도서관에 소장된 16세기 필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당시 차우한 왕국 안에는 다히야(Dahiya)라는 작은 라지푸트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의 공주 아지야(Ajiya)는 프리트비라지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녀는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아자이메루 도성을 찾아 프리트비라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길에 그녀는 폐허가 된 마을 장글루(Janglu)를 발견하고 깊이 슬퍼했으며, 그 자리에 '아지야푸르'라는 새 마을을 세웠다고 합니다. 마침 그 무렵 프리트비라지도 장글루 근처 숲에서 사냥을 하러 왔는데, 그는 아지야를 수도로 데려가 결혼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고대 필사본들에는 프리트비라지의 왕비 중 다히야 왕비에 대한 언급이 실제로 등장합니다. 역사가 무타 나이나시(Mutha Nainasi) 역시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의 왕비 중 아지야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었고, 그녀가 아지야푸르를 조성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역사적 고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3세의 선조인 프리트비라지 1세의 아들 이름이 '아자이라지'였다는 점입니다. 장글루 마을은 바로 이 아자이라지의 이름을 따 '아자이푸라'라고도 불렸으며, 실제로 장글루 지역에서는 프리트비라지 1세의 동전이 발굴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아지야푸르는 차우한 왕자 아자이라지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지의 왕비 중 '아지야'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녀가 곧 아지야푸르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시의 풍습상 미혼 공주가 호위병을 대동하고 스스로 연인을 찾아 나서거나, 마을을 세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 전체에서 아지야의 부모에 대한 언급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결국 아지야의 사랑 이야기는 역사와 문학적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음 화 예고 —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황제의 왕비 이치니의 역사 이야기!

- 모한랄 굽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