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12. 14세 소년왕 프리트비라즈 차우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다

12. 14세 소년왕 프리트비라즈 차우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다

서기 1180년,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에 프리트비라즈 차우한(Prithviraj Chauhan) 왕은 섭정이던 어머니에게서 국정의 모든 권한을 넘겨받았습니다. 이어 그는 선대부터 나라의 요직에 있던 대신들과 관리들을 물러나게 하고,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인물들로 요직을 새롭게 채웠습니다.

어린 왕이 이토록 빠르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강한 야망과 뛰어난 통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일이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어 당대뿐 아니라 후대 사학자들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수상 카담바스의 실권 상실과 최후

프리트비라즈는 아버지와 어머니 시절 재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카담바스(Kadambavas)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프라탑 싱(Pratap Singh)을 앉혔습니다. 아마도 어린 왕은 오래된 수상 카담바스가 자신의 야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여겼고, 그를 실각시킨 뒤 자신이 믿을 만한 신하들을 요직에 임명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프라탑 싱이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수상 카담바스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운명이 프리트비라즈의 길에서 카담바스를 치워 주었다'고 적었습니다. 『프리트비라즈 라소(Prithviraj Raso)』의 작가는 카담바스가 프리트비라즈 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기술했으며, 『프리트비라즈 프라반다』에서는 그의 죽음의 원인을 프라탑 싱에게 돌렸습니다.

반면 다샤라트 샤르마(Dr. Dashrath Sharma) 박사는 프리트비라즈 왕이나 프라탑 싱을 카담바스의 죽음의 원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살해에 관한 구체적 기록들이 모두 후대 문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들에 얼마나 진실이 담겨 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프리트비라즈의 권력 조직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카담바스를 자신의 야망 실현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기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찾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고피나트 샤르마(Dr. Gopinath Sharma) 박사는 이 일에 프라탑 싱의 협조가 있었더라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서기 1180년 이후 중요한 기록에서 카담바스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왕을 보필한 장군들과 학자들

프리트비라즈의 최고 사령관 스칸다는 구자라트 출신의 나가르 브라민(Nagar Brahmin)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왕의 외조부의 형제인 부바니카말을 비롯해 우다야라지, 우다그, 카티아, 고빈드, 고팔 싱 차우한 등 여러 장군이 그를 보좌했습니다. 카담바스가 죽은 뒤에는 파드마나바(Padmanabha)가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리트비라즈의 대신들로는 자야낙(Jayanak), 비디아파티 가우르, 바시슈와르 자나르단, 비슈바루프, 람바타(Rambhatta), 프라탑 싱 등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자야낙은 『프리트비라즈 서사시』를 지었고, 람바타는 역사에 '찬드바르다이(Chandbardai)'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는데, 바로 『프리트비라즈 라소』의 초기 분량을 집필한 인물입니다.

첫 번째 반란 진압 – 아파랑갸와 나르주나

국내 통치 구조를 확실히 손아귀에 넣은 프리트비라즈는 이제 정복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촌인 아파랑갸(Aparangya)가 반기를 들었고, 오늘날 그루가온(Gurgaon·구루그램)이라 불리는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프리트비라즈는 아파랑갸를 격파하고 처형했습니다. 이에 아파랑갸의 동생 나르주나(Nagarjuna)가 반란의 불씨를 되살려 다시 그루가온을 손에 넣었습니다. 프리트비라즈는 곧바로 재공격에 나섰습니다. 나르주나 군대의 총사령관은 데바바타(Devabhatta)라는 장군이었고, 군세도 매우 컸으며 데바바타 또한 용맹한 장수였지만, 정작 나르주나 본인은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프리트비라즈의 군대가 진격해 오자 나르주나는 밤사이 조용히 그루가온을 빠져나갔지만, 그의 어머니, 아내, 자녀를 비롯한 가족들은 프리트비라즈의 손에 넘어가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프리트비라즈는 헤아릴 수 없는 부를 얻었습니다. 『프리트비라즈 비자야(Prithviraj Vijay)』에 따르면, 왕은 많은 반역자들을 생포하여 아제르로 끌고 가 처형한 뒤 그들의 머리를 성벽과 성문에 내걸어, 다른 적들이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나르주나의 최후가 어땠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불 파즐(Abul Fazl)은 『아인-이-아크바리(Ain-i-Akbari)』에서 나르주나를 '나그데브(Nagdev)'라는 이름으로 언급했는데, 나르주나가 『프리트비라즈 라소』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은 아불 파즘이 다른 문헌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접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바다나카족 정벌 – 제국으로 향하는 발걸음

당시 프리트비라즈 왕국 북부, 즉 마투라, 바라트푸르, 알와르 근처에는 바다나카(Bhadanaka)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문헌에 따라서는 반다나크(Bhandanak)로 기록되기도 하는 이들은 무인(武人) 공동체로서 그 수가 매우 많았습니다.

프리트비라즈의 숙부인 비그라하라즈 4세(Vigraharaj IV)는 이들을 예속시키려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나르주나가 프리트비라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다나카족이 나르주나 편에 섰기 때문에, 프리트비라즈는 이들에 대한 응징을 결심합니다.

바다나카족의 수가 워낙 많고 전투적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프리트비라즈는 이번 원정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당시 그의 진영은 오늘날 아제르–링구스 철도 노선에 있는 나라얀 역 근처에 설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서기 1182년경, 프리트비라즈는 '디그비자야(Digvijay, 세계 정복)' 원정에 나섰습니다. 그는 바다나카족을 공격해 그들의 거점을 포위했고, 많은 이들이 살해되거나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공격은 동시대 작가 진파티 수리(Jinpati Suri)가 기록으로 남겼으며, 『카라타라 교단 패율(Kharatara-gachchha Pattavali)』에는 프리트비라즈 왕이 바다나카족의 코끼리 부대를 포획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공격 이후 바다나카족의 세력은 영원히 약화되었고, 이후 역사에서 이 종족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다나카족에 대한 강경한 진압의 결과로 프리트비라즈 왕국의 두 축인 아제르와 델리가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묶였고, 차우한 왕국은 이제 제국의 형태를 갖추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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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한랄 구프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