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첼로 바치아렐리가 그린 용맹공 볼레스와프의 초상
폴란드 최초의 국왕, 용맹공 볼레스와프 1세
볼레스와프 1세 용맹공(Bolesław I Chrobry, 967~1025)은 피아스트 왕조의 군주이자 폴란드 최초의 국왕이다. 미에슈코 1세와 체코의 도브라바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약탈과 정복을 토대로 광대한 강국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는 재위 내내 주변 거의 모든 나라와 충돌했다. 독일과는 밀스코와 루지체 지방을 두고, 체코인들과는 체코 지배권과 모라비아를 두고, 루테니아인들과는 키예프 대공위에 자신 혹은 적어도 자신의 사위를 앉히기 위해 싸웠다. 또한 프로이센과 헝가리와도 분쟁을 벌였지만, 이에 관해서는 사료 속 근거가 빈약하다.
집권 초기와 성 보이치에흐의 선교
볼레스와프는 992년 통치를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나라의 한 구역만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3년 뒤에야 계모 오다와 세 명의 이복 동생들을 몰아내고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바람이 불던 당시 로마에 머물러 있던 프라하 주교 보이치에흐(성 아달베르트)가 폴란드로 찾아왔다. 그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펼칠 계획이었고, 폴란드 공작과 상의 끝에 피아스트 국가와 인접한 프로이센 땅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997년, 볼레스와프의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보이치에흐는 그단스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무장 호위 없이 프로이센 땅으로 들어갔다가 같은 해 4월 23일 순교했다. 폴란드의 군주 볼레스와프는 일부 기록에 따르면 금값만큼의 대가를 치르고 순교자의 유해를 되사 와 그니즈노에 안치했으며, 이것이 이 성인에 대한 숭배의 시초가 되었다. 성 보이치에흐의 신속한 시성 덕분에 폴란드에 교회 관구를 세우려는 노력이 가능해졌다. 이미 999년 교황청은 성 아달베르트 대교구 설립을 승인했고, 이 결정은 1000년 3월 열린 그니즈노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새로운 성인의 무덤 참배차 그니즈노를 방문한 오토 3세 황제와의 회담에서 볼레스와프의 나라는 수도를 그니즈노로 하는 독립된 교회 조직(관구)을 갖게 되었고, 성 보이치에흐의 동생 라짐 가우덴티가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크라쿠프, 브로츠와프, 코워브제크에 주교구가 새로 만들어졌다. 포즈난에는 대주교에게 종속되지 않는 운거 주교가 평생 머물렀으며, 그가 죽은 뒤 포즈난 교구는 그니즈노 관할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니즈노 회의와 '대관식' 논란
그니즈노 회의에서 오토 3세 황제는 직접 볼레스와프의 머리에 제관을 씌워 주었다. 폴란드 연대기 전통에서는 이 사건이 잘못되게 왕의 대관식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실제로는 기껏해야 대관식이 예고되었을 뿐이며, 오토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독일과의 전쟁과 군사적 성과
볼레스와프는 더 정예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독일군과의 충돌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기만 전술을 구사하고 적군을 의도적으로 소진시키는 한편, 야외에서의 정면 결전은 피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1015년에는 디아도샨족 땅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고, 1017년 그의 군대가 성공적으로 수행한 님차 방어전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폴란드 역사에서 유일하게 볼레스와프만이 독일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군주였다. 최종 화약은 1018년 부드지신(바우첸)에서 체결되었고, 이에 따라 볼레스와프는 밀스코와 루지체를 손에 넣었다. 다만 하인리히 2세와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 과정에서 서포모제가 피아스트 국가에서 이탈하고, 그곳에 세워졌던 코워브제크 주교구는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때 프라하를 차지해 볼레스와프 4세라는 이름으로 그 왕좌에 앉기도 했다. 이후 키예프 원정에서 상당한 전리품을 챙기고, 미에슈코 1세 말년에 잃었던 체르벤 성곽 도시들을 되찾았다.
키예프 원정과 가족
1013년에는 아들 미에슈코 람베르트와 황제의 조카 리케자의 혼인을 주선했다. 이어 1018년에는 부크 강 전투에서 화려한 승리를 거두고 키예프에 입성해 그곳의 군주 야로슬라프 현공(현자)을 몰아냈다. 한편 아내 엠닐다는 오랜 세월 그의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기독교의 정착과 슬라브 제국의 꿈
용맹공의 통치는 폴란드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 보이치에흐의 죽음을 능숙하게 활용해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진정한 후원자로 그리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의 시대에 웅장한 석조 궁전과 교회들이 잇달아 세워지기 시작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군주는 폴란드에 새로운 신앙을 들여온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전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말년의 볼레스와프가 왕위 서임을 넘어 새로운 슬라브 '제국' 건설까지 꿈꾸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그는 죽기 몇 주 전인 1025년 4월 18일 드디어 대관식을 거행했고, 같은 해 6월 17일 폴란드 국왕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후대의 평가
그의 업적을 기록한 이는 폴란드 연대기 작가들만이 아니었다. 메르제부르크의 주교 티트마르 역시 그를 상세히 다루었다. 갈루스 아노니무스에게 그는 '위대한' 볼레스와프였다. 반면 독일 측 역사가는 그를 사탄 자신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폴란드의 첫 국왕 볼레스와프가 '용맹공(Chrobry)'이라는 별칭을 얻기까지는 그가 죽은 뒤 수백 년이 더 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