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남자 선수마저 꺾은 19세기 사이클링 여왕, 루이즈 아르마인도

지구력 걷기 선수이자 사이클링의 개척자였던 루이즈 아르마인도(Louise Armaindo, 1861~1900)는 '세계 사이클링 챔피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남자 선수마저 꺾은 19세기 사이클링 여왕, 루이즈 아르마인도

서커스의 '힘센 여인'

루이즈 아르마인도는 1861년 캐나다 몬트리올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루이즈 혹은 루이자 브리스부아(Louisa Brisebois)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서커스에서 '힘센 여인(strong woman)'으로 활동했고, 아버지는 방랑을 일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유년기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고 신뢰성도 떨어지는데, 훗날 무대 예명 '루이즈 아르마인도'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삶과 출신을 과장하고 미화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어머니의 발길을 따라 서커스 공중그네 곡예사이자 '힘센 여인'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안전 장비를 착용한 채 이빨만으로 두 남자를 들어 올렸고, 무려 300kg가 넘는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는 일화도 전하지만, 과장이 가미된 이야기임이 짐작됩니다. 어떻든 루이즈는 고되고 위험한 데다 보수까지 형편없는 이 직업에 싫증을 느꼈고, 1870년대 후반 캐나다를 떠나 시카고로 향했습니다.

페니퍼딩 자전거와의 만남

루이즈는 같은 캐나다 출신 운동선수 톰 에크(Tom Eck)를 만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당시 지구력 걷기는 큰 인기를 누리던 스포츠였습니다. 1773년 포스터 파월(Foster Powell)이 400마일(약 640km)을 걷고, 1809년 로버트 바클레이 대위(Captain Robert Barclay)는 1,000시간 동안 매시간 1마일(1.6km)씩 걷는 기록을 세우는 등, 선수들은 놀라운 거리를 소화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공연을 구경하러 몰려들었고, 스포츠 베팅이 성행했으며 일부 경기에서는 상당한 상금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톰 에크가 코치이자 매니저, 그리고 훗날에는 남편이 되어 준 가운데, 루이즈는 경보 대회에 도전해 미국 전역의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른 경쟁자들처럼 루이즈 역시 자전거, 특히 당시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빅 바이(big bi)', 즉 페니퍼딩(penny-farthing)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훨씬 큰 이 자전거는 한 번의 페달 밟기로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어 기록 향상에 유리했습니다. 다만 일반 자전거보다 조종이 까다롭고 위험했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습니다.

첫 대회, 그리고 남자 선수와의 대결

남자 선수마저 꺾은 19세기 사이클링 여왕, 루이즈 아르마인도

루이즈 아르마인도가 기록에 남은 첫 대회에 나선 것은 1882년, 남자 선수와의 대결이었습니다. 당시 자전거 경주는 태동기에 접어든 시절로, 남자 선수조차 많지 않았고 여자 선수는 더욱 드물었습니다. 루이즈는 같은 종목의 여자 선수들과의 대결을 명예로 여겼지만, 선수 생활 내내 남자 선수들과도 꾸준히 맞붙었습니다.

1882년, 그녀는 50마일(약 80km)이 넘는 경주에서 미국의 사이클 선수 존 프린스(John Prince)와 격돌합니다. 프린스가 5마일 앞선 상태로 출발한 이 대결은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프린스가 약 1분 차이로 승리했습니다.

같은 해, 루이즈는 '여자 사이클링 챔피언'으로 불리던 엘자 폰 블루멘(Elsa von Blumen)에게 도전장을 던집니다. 루이즈보다 유명했던 엘자 역시 전직 경보 선수였지만, 그동안 루이즈의 도전을 외면해 왔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필라델피아 리지웨이 파크(Ridgeway Park)에서 맞붙었고, 승자는 루이즈였습니다. 이후 언론은 그녀를 "당대의 세계 여자 사이클링 챔피언"이라 불렀습니다. 당시에는 여자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없었기에 이 칭호는 스스로 붙인 것이었지만, 언론조차 이를 인정할 만큼 그녀의 실력은 뛰어났습니다.

'세계 사이클링 챔피언'

이후 루이즈 아르마인도는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공연과 대회에 출전하며 남자·여자 선수를 가리지 않고 승부를 벌였습니다. 롯티 스탠리(Lottie Stanley), 제시 오크스(Jessie Oakes), 메이 앨런(May Allen) 등 점점 늘어나는 여자 선수들과도 경쟁했습니다.

1883년, 그녀는 윌리엄 J. 모건(William J. Morgan)과 윌리엄 M. 우드사이드(William M. Woodside)라는 두 남자 선수를 6×12시간 경주에서 꺾고, 843마일(약 1,357km)을 달려 거리 기록을 세웠습니다. 72시간 동안 시속 평균 19km를 달린 셈입니다.

같은 해 밀워키에서 열린 6×3시간 핸디캡 경주에서도 루이즈는 같은 두 남자 선수를 다시 제압하며 첫 승리를 확인했습니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72시간 경주에서는 존 프린스에게 설욕전을 벌여 무승부를 이뤄냈습니다. 1886년에는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26시간 경주에서 프레드 M. 쇼(Fred M Shaw)를 꺾었습니다.

루이즈는 탠덤 자전거에도 도전했습니다. 1886년 윌리엄 J. 모건과 함께 24시간 동안 250마일(약 402km)의 거리 기록을 세웠고, 100마일(약 160km)을 7시간 57분에 주파하는 시간 기록도 달성했습니다.

화려한 은퇴, 잊혀진 여왕

1880년대 후반부터 루이즈 아르마인도의 사이클링계, 특히 여자 사이클링계에 대한 지배력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1889년 뉴욕의 제시 오크스, 해티 브라운(Hattie Brown), 젤렌 볼드윈(Jelen Baldwin), 영국 셰필드의 롯티 스탠리, 메이 앨런, 제시 우즈(Jessie Woods), 릴리 윌리엄스(Lillie Williams) 등 새롭게 등장한 선수들이 실내 경주에서 그녀를 앞질렀습니다. 결국 1893년, 루이즈는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스포츠계를 떠난 뒤 그녀는 미니애폴리스의 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습니다. 이 모습을 두고 필라델피아의 신문 스포팅 라이프(Sporting Life)는 이렇게 썼습니다.

"미국 사이클링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놓고 다투는 남자는 많지만, 루이즈 아르마인도를 그 어머니라 부를 권리를 두고 이의를 제기하는 여자는 없다. 루이즈는 (…) '레이디 사이클리스트(lady cyclist)'라는 긍지 높은 칭호를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라 선언한 인물이다. 루이즈는 남자, 여자, 말, 보안관, 에크, 그리고 이 자전거의 공정하고 온화한 여왕을 이길 수 있다고 여긴 거의 모든 이들과 경주를 벌였다. 오늘날 그 자갈길의 전 여왕은 웨이트리스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미니애폴리스의 식당을 누비며 왕복한다. (…) 추락하고 잊힌 왕족의 모습만큼 쓸쓸한 것이 있을까?"

루이즈 아르마인도는 190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