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본명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1819년 5월 24일 ~ 1901년 1월 22일)은 무려 63년간 영국을 다스린 군주입니다. 영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그녀보다 오래 통치한 인물은 엘리자베스 2세가 유일할 정도입니다. 여왕이 자신의 나라와 유럽 역사에 남긴 영향은 너무나 컸고, 그 결과 한 시대 전체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시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지 3세의 뜻으로 지어진 이름
태어난 소녀는 세례 때 할아버지 조지 3세의 뜻에 따라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는 당대 최강의 군주였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는데, 그가 바로 신생아의 대부(代父)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년 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딸의 첫 번째 이름인 '알렉산드리나'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독일과 깊이 얽힌 왕가의 인연
여왕의 어머니 또한 빅토리아라 불렸으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출신의 독일 공주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여왕의 남편이 될 알베르트 왕자 역시 같은 가문 출신이었는데, 그는 여왕의 사촌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여왕과 그녀의 자녀들은 모두 독일어에 능숙했습니다. 빅토리아는 언제나 "우리 집안에는 독일적 요소가 항상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전쟁에서는 프로이센을 일관되게 지원했습니다. 1864년 베를린과 코펜하겐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두고 다투었을 때, 1866년 독일 패권을 놓고 벌인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원한 적'으로 여겼던 러시아
반면 빅토리아는 러시아를 "우리의 영원한 적", "타락한 나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적개심의 근원은 유럽과 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런던 사이에 벌어진 오랜 경쟁이었습니다. 크림 전쟁 당시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다른 진영에 섰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분쟁(독립 불가리아 탄생으로 이어진 1877~1878년 전쟁 포함)에서 영국은 언제나 콘스탄티노플 편에 섰습니다. 반대로 보어 전쟁 중에는 러시아가 영국의 적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모범적인 부부로 왕실 이미지를 되살리다
빅토리아와 남편 알베르트는 국민들 사이에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왕의 백부들은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형편보다 사치를 부리고, 정부를 들이며, 혼외자식을 낳는 등 존경받기는커녕 국민들의 사랑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와 알베르트는 서로에게 충실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자녀들의 교육과 양육을 직접 살폈고 화려한 파티를 열지 않는 모범적인 부부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전임자들이 남긴 나쁜 인상을 씻어낼 뿐 아니라, 가정 생활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빅토리아 자신은 고루한 사람이 아니라 육체적 즐거움을 사랑했지만, 오직 부부 사이에서만 그런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문명의 도약과 '인도 여황제'
빅토리아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은 거대한 문명적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철도망이 눈부시게 발달했고, 여왕은 역사상 최초로 기차를 타고 이동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해양 강국으로 도약했고, 그 해군은 독일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수많은 식민지에서 제국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여왕 스스로 '인도 여황제(Empress of India)'로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제한된 권력, 그러나 막강한 외교적 영향력
프로이센이나 러시아의 절대 군주와 달리 영국 군주의 권력은 제한적이었지만, 빅토리아는 가족과 친분의 네트워크를 통해 외교 정책에 영향을 행사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여러 통에서 열두 통에 이르는 서신을 다른 왕가의 군주들, 그 가족들, 친구들에게 보냈습니다. 여왕의 개인적인 노력 덕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관계를 따뜻하게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통일된 독일에 맞서는 동맹국까지 확보하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과학의 새로운 소식을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출산 시 클로로포름 마취를 사용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정치 참여에는 반대한 여왕
흥미로운 사실은, 빅토리아 자신이 강력한 통치자였음에도 여성의 정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여성의 자리는 남편을 잘 모셔주는 것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동성의 지적 능력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고, 한번쯤은 "가장 교양 있는 여성의 의견보다 가장 우둔한 남자의 의견을 더 존중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혈우병 유전자가 만든 비극
여왕에게는 9명의 자녀, 42명의 손주, 87명의 증손주가 있었고, 그들 모두에게 적합한 배필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혈우병 보인자였습니다. 혈우병은 혈액이 정상적으로 응고되지 못해 내·외부 출혈을 일으키고 치명적일 수 있는 질환으로, 여성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남성에게만 발병합니다. 여왕의 유전적 결함은 대부분 자발적 돌연변이의 결과로 추정됩니다.
여왕의 아들 레오폴드는 혈우병을 앓았고, 딸 앨리스와 비아트리스는 어머니처럼 보인자였습니다. 앨리스는 결함 유전자를 딸 알릭스(Alix)에게 물려주었고, 알릭스는 1894년 니콜라이 2세와 결혼했습니다. 이 혼인에서 태어난 왕세자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갖고 태어났고,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 황후는 기이한 방식으로 아이의 출혈을 멎게 할 수 있다는 라스푸틴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비아트리스의 딸 빅토리아 유게니아도 혈우병 보인자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국왕과 결혼해 혈우병에 걸린 아들을 낳았고, 이것이 결국 두 사람의 결혼 생활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까지 흐르는 빅토리아의 피
현재 유럽에는 빅토리아의 피가 흐르지 않는 왕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여왕의 후손으로는 엘리자베스 2세와 그녀의 남편 필립 공작이 있습니다(빅토리아의 딸 앨리스는 헤센의 루이 공자와 결혼했고, 그들의 손녀 역시 앨리스라는 이름으로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해 필립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은 여왕의 손녀인 코노트 공작부인 마거릿(스웨덴 왕세자비)의 후손입니다. 스페인의 펠리페 6세 국왕은 모계와 부계 양쪽 모두에서 이 강력한 군주와 혈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소피아 왕비는 여왕의 장녀이자 독일 황후가 된 빅토리아의 고손녀이며,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앞서 언급한 혈우병 보인자 빅토리아 유게니아의 손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