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믈러 (사진: Bundesarchiv, Bild 183-R99621, CC-BY-SA 3.0)
하인리히 히믈러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독일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전쟁 범죄자이자 게슈타포(Gestapo)의 공동 창설자이자 수장이었다. 그는 1900년 뮌헨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닌 중산층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보수 성향의 교사였다. 흥미롭게도 어린 시절의 하인리히는 폭력적인 기질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군대와 군사에 대한 동경이 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인 1915년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결국 전선에 배치되지 못했고, 장교 과정 입학에도 실패했다.
2년 후인 1918년,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는 독일의 전쟁을 "성스러운 싸움"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법적인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동거하던 매춘부 살해 혐의를 받은 것이다. 1919년에는 군 경력을 접고 농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준군사 조직과의 연결고리는 계속 유지했다. 이후 나치당(NSDAP)에 입당했고, 실패로 끝난 뮌헨 폭동(맥주홀 폭동)에 가담한 뒤에는 모든 것을 잃고 부모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석방되어 당을 재건한 후, 히믈러는 다시 당에 복귀하며 빠르게 승진의 길을 걸었다. 1927년에는 SS 부사령관이 되었고, 1929년에는 SS 전국지도자(Reichsführer-SS)로 임명되어 SS를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조직 중 하나로 변모시켰다. 1936년에는 독일 경찰 총수로 임명되었으며, 게슈타포의 수장도 겸임했다. 그는 오컬트와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레벤스보른(Lebensborn)' 프로그램과 강제 수용소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첫 번째 시범 수용소는 다하우에 세워졌다.
유대인 등 대량 학살을 자행한 특별행동대(Einsatzgruppen)의 창설을 주도한 것도 히믈러였다. 또한 인종 등록 사업과 동유럽 정복·식민화 계획인 소위 '동부 총계획(Generalplan Ost)'을 추진했다. 1943년부터는 내무장관을 맡으며 제3제국에서 히틀러 다음가는 실권자로 군림했다. 1944년 여름에는 게릴라 조직 '베어볼프(Werwolf)'의 조직을 명령했고, 바르샤바 봉기 이후에는 바르샤바 시 전체의 파괴를 지시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노병과 소년으로 구성된 국민돌격대(Volkssturm)를 창설했다.
하인리히 히믈러의 최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제3제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히믈러는 서방 연합국과 별도의 강화 협상을 몰래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배신 행위는 히틀러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분노한 히틀러는 그의 체포령을 내리고 나치당 당적마저 박탈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히믈러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하며 도피를 시도했지만 체포되었고, 1945년 5월 23일 청산가리를 물어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