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1122~1204): 두 왕국을 품은 중세 최강의 여인

프랑스 왕관에 안겨진 아키텐 공국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1122~1204): 두 왕국을 품은 중세 최강의 여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는 프랑스어로 '알리에노르 드 기옌(Aliénor de Guyenne)'이라 불리며, 오늘날에는 영어식 이름인 '엘레오노르'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 중 하나인 아키텐 공국의 단독 상속녀였습니다.

1137년, 어린 나이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하면서 그녀가 지닌 아키텐 공국 전체가 프랑스 왕국의 영토로 편입됩니다. 교양이 뛰어나고 트루바두르(방유 시인) 문화를 깊이 사랑했던 엘레오노르였지만, 독립적이고 강렬한 성격은 신중하고 금욕적인 남편과는 극명하게 충돌했습니다.

제2차 십자군과 부부 관계의 균열

1147년,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비로서는 이례적으로 남편을 따라 제2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합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예상과 달리 실패로 끝났고, 도중에 벌어진 갈등과 스캔들은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1152년, 교회는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선언했고, 엘레오노르는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아키텐 공국은 다시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단 2개월 만의 파격적인 재혼

혼인이 무효화되자마자 분노에 가득 찬 그녀는 불과 두 달 만에 노르망디 공작 앙리 플랜태제네(Henri Plantagenêt)와 재혼합니다. 이는 프랑스 왕실에 대한 강력한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녀가 지닌 방대한 영지가 프랑스 왕의 경쟁자에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1154년 앙리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엘레오노르도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여성이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대 왕국의 왕비를 모두 지낸 셈입니다.

찬란한 10년과 어머니로서의 삶

이후 10여 년간 엘레오노르는 행복하고 화려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 그녀는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그중에는 훗날 '사자심왕'이라 불릴 리처드(Richard Cœur de Lion)와 '잉글랜드 없는 왕' 존(Jean sans Terre, 1166년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편에 맞선 아들의 편

그러나 헨리 2세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엘레오노르는 결국 남편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프랑스 내 자신의 영지 중심지인 푸아티에(Poitiers)로 물러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는 한편,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아들 리처드의 대관식을 주관했으며,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포로로 잡힌 리처드를 석방하기 위해 거액의 몸값까지 직접 마련해 주었습니다. 늙지 않은 정치적 감각과 모성이 함께 빛난 순간이었습니다.

80년의 풍요로운 삶을 닫으며

엘레오노르는 왕비, 십자군 참전자, 반역자, 그리고 위대한 모후로서 중세 유럽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1204년, 그녀는 80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혈통은 이후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조에 오랫동안 이어지며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