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3세, '리슈몽'이라 불린 백년전쟁의 명장 (1393~1458)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3세,  리슈몽 이라 불린 백년전쟁의 명장 (1393~1458)

브르타뉴 공작의 아들로 태어나다

아르튀르 드 리슈몽(Arthur de Richemont)은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아들로 태어난 인물이다. 그의 인생은 프랑스 백년전쟁의 격동기와 궤를 같이하며, 몇 차례의 실각과 화려한 재기를 거듭한 파란만장한 군인의 삶이었다.

아쟁쿠르 전투의 상처와 포로 생활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튀르는 부상을 입었고, 이때 남긴 흉터로 인해 '흉터 낀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1420년까지 영국에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으나, 이 시간은 오히려 그의 정치적 통찰력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대원수 임명과 실각

샤를 7세의 장모였던 욜랑드 다라공(Yolande d'Aragon)의 후원으로 아르튀르는 1425년 프랑스 대원수(Constable of France)로 임명된다. 그러나 아르튀르는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로, 왕의 총신들마저 과감히 공격할 만큼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결국 그는 왕실의 미움을 사 실각하고 말았으며,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멀어졌다.

오를레앙 구원과 파타이 전투

그러나 오를레앙이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리슈몽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브르타뉴 출신 병력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직접 이끌고 도시 구원에 나섰으며, 1429년 파타이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며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왕실에 남아 있던 원한은 쉽게 풀리지 않아, 잔 다르크가 여러 차례 간절히 청했음에도 그는 랭스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정적의 실각과 연이은 승리

운명의 바람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1433년 정적 라 트레무아유(Georges de La Trémoille)가 실각하면서 리슈몽은 복권되어 왕실의 신임을 회복했다. 이후 그는 귀족들의 반란인 '프라게리(Praguerie)' 진압에 단호하게 나섰고, 1436년에는 승전의 기세로 파리에 입성하는 영광을 안았다. 1450년에는 노르망디 탈환의 분수령이 된 포르미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백년전쟁의 종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3세의 최후

1457년 브르타뉴 공작위가 그에게 돌아오면서 아르튀르는 '아르튀르 3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공작으로서의 통치는 짧았다. 그는 1458년 세상을 떠났으며, 정치적 흥망성쇠를 수없이 겪었으면서도 끝내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충성스러운 군인이자 대원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