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세에 즉위한 어린 왕
샤를 9세는 형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자 불과 1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인 1560년, 그는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미셸 드 로피탈이 소집한 삼부회(에스타 제네랄)의 개회식을 주재했다. 두 사람은 어린 왕의 후견을 맡아 신교도(위그노)들에 대한 온건한 화해 정책을 추진했다.
실패한 화해 정책과 종교 전쟁의 재연
그러나 이러한 화해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누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나바르의 앙리(훗날 앙리 4세)의 결혼을 계기로 나라 안팎의 종교적 긴장은 다시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
1572년 8월 23일 밤부터 24일로 넘어가는 밤, 샤를 9세는 파리에 거주하던 신교도 지도자들의 암살을 직접 명령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이다. 대학살 이후 샤를 9세는 점차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고립된 왕과 권력 다툼
왕제 앙주 공작 앙리(왕국 총감독관 겸 중장)는 가톨릭 진영의 실질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다. 반면 또 다른 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는 신교 귀족들과 손잡고 음모를 꾸미며 왕권에 도전했다.
요절과 뒤이은 계승
원래 건강이 허약했던 샤를 9세는 결핵으로 인해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희귀한 혈한증(피가 섞인 땀을 흘리는 증상)에도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1570년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으나 남계 후사를 얻지 못했고, 결국 동생 앙주 공작 앙리가 왕위를 계승해 앙리 3세로 즉위했다.
프랑스 왕조 계보
프랑수아 2세(재위 1559~1560) < 프랑스 국왕 > 샤를 9세(재위 1560~1574) → 앙리 3세(재위 1574~1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