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맹공 샤를(Charles le Téméraire)은 비범한 용기의 소유주였지만, 동시에 거칠고 충동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이 단 하나뿐이었는데, 바로 무력이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의 대결
샤를은 '공익 동맹(Ligue du Bien public)'이라는 틀 안에서 과감히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게 도전했다. 그는 1465년 몽트레리(Montlhéry) 전투에서 국왕군과 직접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어 파리를 포위하는 등 강경한 행보를 이어갔다. 결국 그의 압박에 굴복한 루이 11세는 피카르디(Picardie) 지역을 다시 샤를에게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부르고뉴 왕국의 꿈
샤를의 최대 목표는 부르고뉴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 국가를 건설하고, 스스로 왕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신권(神權)에 의한 군주라고 여겼으며, 프랑스 국왕에게 도전할 기회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심지어 1468년 페론느(Péronne) 회담 이후에는 루이 11세를 몹시 굴욕을 주며 모욕하기까지 했다.
첫 번째 좌절과 몰락
그러나 샤를의 승슬장구는 오래가지 못했다. 1472년 보베(Beauvais) 공방전에서 첫 번째 큰 좌절을 맞았고, 이후 스위스 연방과의 전쟁에서는 수많은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 1476년 그랑송(Grandson)과 모라(Morat) 전투에서 연달아 참패하면서 그의 세력은 급격히 기울었다.
낭시에서 최후를 맞다
1477년, 샤를은 로렌(Lorraine)을 침공하고 낭시(Nancy)를 포위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그의 생명은 끝나고 말았는데,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장군 중 한 명에게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르고뉴의 마지막 야심가 샤를의 죽음과 함께, 유럽을 뒤흔든 부르고뉴 공국의 대업도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