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우피네 명문 가문의 후예
스타니슬라스 마리 애들레이드 드 클레르몽-토네르(Stanislas Marie Adélaïde de Clermont-Tonnerre, 1757~1792)는 프랑스 남동부 다우피네(Dauphiné) 지방의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으로, 그중 한 사람은 퐁트누아 전투(1745) 당시 프랑스 원수(Marshal of France)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계몽사상에 깊이 몰두하여 장자크 루소(Rousseau)와 디드로를 중심으로 한 백과전서파(앙시클로페디스트)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러한 지적 배경은 훗날 그가 혁명 초기 온건 개혁파로 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
귀족 신분을 내려놓고 제3신분에 합류하다
1789년 삼부회(Estates-General) 소집 때 클레르몽-토네르는 귀족 신분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회 수립 과정에서 그는 제3신분(Tiers État)에 합류한 귀족 대표들을 이끄는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특권 신분의 일원이 자발적으로 평민 대표들과 손을 잡은 것은 당시로서 매우 상징적인 선택이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영국식 양원제에 기반한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즉, 왕권을 유지하되 의회가 이를 견제하는 체제를 구상한 것이다. 또한 그는 국왕에게 거부권(veto)을 부여하는 안건의 통과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이 때문에 급진파와 민중에게 '왕당파'로 몰리며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8월 10일 사건과 비참한 최후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과 산클로트(sans-culottes)들이 튈르리 궁을 습격하여 왕정이 사실상 무너지던 그날, 클레르몽-토네르는 자택에서 산클로트들의 폭습을 받아 참살당했다. 혁명의 온건 개혁 노선을 걸었던 그의 최후는 프랑스 혁명이 급진화되며 드러낸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