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상인 대표로서의 부상
에티엔 마르셀은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파리 상인 대표(prévôt des marchands)로서, 백년전쟁의 전비 조달 문제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1355년과 1357년에 열린 삼부회(에스타트 제네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왕권에 맞서 도시 민중과 제3신분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1358년 2월 22일, 파리 최초의 혁명적 봉기
왕태자(훗날의 샤를 5세)와 격렬히 대립하던 마르셀은 1358년 2월 22일, 파리 역사상 최초의 혁명적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궁전을 습격해 왕태자를 압박했고, 결국 1357년 대칙령의 재확인을 강제로 받아냈습니다. 이 칙령에는 삼부회가 국가 보조금(특별 세금)의 사용을 감독할 권한을 갖는다는 내용과, 왕태자 곁에 삼부회가 임명한 자문관을 배치한다는 조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파리 장악과 고립
이 사건 이후 마르셀은 사실상 파리의 주인이 되었으며, 자신의 개혁 대의에 각 지방을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궁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왕태자는 파리 주변을 봉쇄하며 도시를 고립시켰고, 상황은 점차 마르셀에게 불리하게 기울었습니다.
동맹의 실패와 비극적 최후
마르셀은 '악왕'이라 불리는 나바라의 샤를 2세와 손잡으면서 정치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동맹은 그를 왕권 측의 반역자로 규정짓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그가 한밤중에 샤를 2세를 파리 성안으로 들이려던 계획을 실행하던 중, 왕태파였던 시찰관 장 마야르에게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파리의 개혁 운동은 좌절되었지만, 마르셀의 봉기는 이후 프랑스 역사에서 시민이 왕권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