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부르봉 왕조를 연 프랑스 국왕 헨리 4세(1553~1610)

부르봉 왕조를 연 프랑스 국왕 헨리 4세(1553~1610)

나바르 왕에서 프랑스 국왕까지

헨리 4세(Henri IV)는 나바르의 왕 앙투안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n)과 잔 달브레(Jeanne d'Albret)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성왕 루이(루이 9세)의 후손이라는 귀한 혈통을 지닌 왕족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위그노) 사이의 격렬한 종교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의 삶 역시 이 갈등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전개되었다.

종교적 갈등 속의 유년기

헨리는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독실한 칼뱅주의 신앙인이었던 어머니 잔 달브레의 영향 아래 칼뱅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이후 종교개혁 진영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혼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1572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그는 발루아 왕가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화합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결혼 축하 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수많은 프로테스탄트가 학살되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벌어지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왕위 계승과 제8차 종교전쟁

1584년 알랑콩 공작이 사망하면서 헨리는 프랑스 왕위의 법정 상속인이 되었다. 제8차 종교전쟁 동안 그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기즈 공작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헨리 3세에게 접근해 협력 관계를 맺었다.

'파리는 미사 값어치가 있다'

1589년 헨리 3세가 암살되자 헨리는 부르봉 왕조 최초의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이 강했던 파리의 저항에 부딪히자, 그는 "파리는 미사 값어치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후 샤르트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낭트 칙령과 왕국의 재건

국왕이 된 헨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해 프로테스탄트의 예배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길었던 종교전쟁을 종식시켰다. 아울러 수석 대신 쉴리(Sully)의 보필을 받아 황폐해진 왕국 경제를 회복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이던 1610년 5월 14일, 광신도 라바이약(Ravaillac)의 칼에 찔려 비운의 최후를 맞이했다.

프랑스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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