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귀스트 드 마르몽(Auguste de Marmont, 1774~1852)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관통하며 화려한 영광과 뼈아픈 배신자라는 오명을 동시에 짊어진 인물이다. 툴롱에서 무명 장교로 나폴레옹 곁에 섰던 소년은 제국 원수까지 올랐지만, 말년에는 왕당의 신변이 되어 조국 밖에서 생을 마감했다.
툴롱에서의 운명적 만남
마르몽은 1793년 툴롱 공방전 당시 주노(Junot)와 함께 보나파르트의 두 번째 부관(aide-de-camp)으로 발탁되며 군 경력의 전환점을 맞는다. 이 만남은 단순한 인연을 넘어 그의 평생을 좌우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이집트 원정이라 불린 동방 원정과 이탈리아 전역에서 나폴레옹을 따라 눈부신 활약을 펼쳤고, 1799년 권력 탈취의 기폭제가 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도 가담하며 황제의 측근 반열에 확실히 올라섰다.
마렝고와 바그람, 원수로 오르다
1800년 마렝고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마르몽은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예비군을 지휘하며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제국 원수(Maréchal d'Empire)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젊은 나이에 정점에 오른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향해 포르투갈과 스페인 전선에서 웰링턴 공작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웰링턴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반도 전쟁'에서의 명운은 사실상 끝나고 만다.
1814년, 파리 방어와 용서받지 못한 선택
1814년 프랑스 본토가 연합군의 침공을 받자 마르몽은 파리 방어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몇 차례의 격전 끝에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외무장관 코랭쿠르(Caulaincourt)와 함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최초의 항복 협상을 진행해 연합군의 파리 입성을 허용했다. 이 결정은 도피 중이던 나폴레옹의 분노를 샀고, 황제는 자신의 오랜 부관이 성문을 열어준 것을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마르몽은 이후 '배신자'라는 꼬리표를 평생 떨치지 못하게 된다.
왕정복고와 망명으로 끝난 말년
나폴레옹 실각 후 마르몽은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새 질서에 합류했다. 왕정복고기에 다양한 요직을 거쳤으나,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의 왕정이 무너지자 폐위된 국왕을 호위하며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다시는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유럽 각지를 떠돌다 1852년 베네치아에서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그가 남긴 회고록은 나폴레옹 시대를 연구하는 귀중한 1차 사료로 오늘날까지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