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분델칸드를 정복하면서 그의 왕국 영토는 칸나우지의 가하다발라 왕조 국경까지 닿게 되었다. 서쪽의 무슬림 세력이 차우한 왕가의 적이었듯이, 북쪽으로는 잠무의 라자, 남쪽으로는 찰루키아 통치자들, 동쪽으로는 첸델 왕조, 북동쪽으로는 가하다발라 왕조가 차우한 왕가의 적들이었다.
자이찬드와 프리트비라지의 원한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나가족, 반다나카족, 찰루키아, 첸델 왕조를 차례로 격파하자, 칸나우지의 군주 자이찬드의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일기 시작했다. 일부 전설에 따르면, 델리의 왕 아낭팔의 두 딸 중 한 명은 아제르의 왕 소메슈바르에게 시집갔고, 그 사이에서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태어났다. 다른 딸은 칸나우지의 왕 비자이팔에게 시집가 아들 자이찬드를 낳았다고 한다. 즉, 프리트비라지 차우한과 자이찬드는 사촌 형제였다는 것이다.
델리의 아낭팔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자이찬드는 델리 왕위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낭팔 토마르 왕은 델리 왕국을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에게 넘겼다. 이에 자이찬드는 사촌인 프리트비라지와 원수 관계가 되었고, 그를 굴욕시킬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스와얌바르와 피어난 사랑
『프리트비라지 라소』의 작가인 시인 찬드 바르다이는 차우한 왕가와 가하다발라 왕가 간의 갈등의 원인을 자이찬드의 딸 사뇨기타에게서 찾았다. 라소의 설명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은 외모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미의식이 발달해 여러 아름다운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한다.
프리트비라지의 용맹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자이찬드의 딸 사뇨기타는 마음속으로 프리트비라지를 배필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 자이찬드 왕이 사뇨기타의 혼사를 위해 스와얌바르(공주가 스스로 배필을 고르는 의식)를 열었지만, 이미 깊어진 원한 때문에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은 초대받지 못했다. 오히려 자이찬드는 그를 모욕하기 위해 스와얌바르 장소 밖에 프리트비라지의 철상을 세워 문지기 역할을 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뇨기타 공주는 프리트비라지 왕에게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이에 프리트비라지 왕은 신뢰하는 부하들과 함께 변장하고 칸나우지에 잠입했다. 사뇨기타 공주는 아버지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스와얌바르에서 프리트비라지의 동상에 화환을 걸어 선택의 의사를 밝혔다.
대담한 납치
프리트비라지 왕은 스와얌바르 장소에서 사뇨기타를 데리고 도주했다. 칸나우지의 거대한 군대조차 그를 막지 못했다. 프리트비라지의 신뢰할 수 있고 용맹한 봉신들과 장군들은 왕이 사뇨기타와 함께 아제르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칸나우지군과 결사적으로 싸웠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많은 봉신들과 장군들이 목숨을 바쳤다. 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수도 아제르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비타사히 상세』라는 문헌에는 이 일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그때 프리트비라지 왕이 산조가타(사뇨기타)를 취하였으니, 자이찬드 왕의 열여섯 갈래 고귀한 가문의 공주요, 백 명의 현자가 신뢰를 두었던 이였다. 자이찬드 왕은 분노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으며, 오직 백 명의 기사가 목숨을 바쳤다.”
사랑, 희생, 용맹으로 이루어진 이 서사시는 『프리트비라지 라소』에서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유명 소설가 아차르야 차투르센 역시 그의 소설 『푸르나후티』에서 프리트비라지 라소를 바탕으로 이 사랑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역사적 진실성을 둘러싼 논쟁
그러나 현대 역사가 로밀라 타파르, R.S. 트리파티, 고리샹카르 히라찬드 오자 등은 이 사건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이찬드 왕의 비문과 『람바만자리』에서는 사뇨기타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사뇨기타의 이야기는 16세기 궁정 시인(바트)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 C.V. 바이디야, 고피나트 샤르마 박사, 다스라트 샤르마 박사 등의 학자들은 사뇨기타 납치 사건을 실제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회의론자들의 주장과 그 한계
로밀라 타파르 등은 프리트비라지의 어머니 카르푸르데비가 델리 출신이 아니라 체디 지방의 공주였다는 점을 근거로 이 이야기를 의심한다. 반면 바트 문헌과 크얏(khyat) 문헌들은 프리트비라지를 아낭팔의 외손자라고 기술한다.
프리트비라지가 실제로 아낭팔의 외손자가 아니더라도, 체디 지방의 칼추리 왕 아찰라지와 델리의 토마르 왕 아낭팔 사이에 어떤 혼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를 근거로 프리트비라지가 델리의 아낭팔의 외손자로 여겨졌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프리트비라지가 아낭팔의 외손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사뇨기타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만약 프리트비라지와 자이찬드가 실제로 사촌이었다면, 프리트비라지는 사뇨기타의 삼촌 항렬이 되어 납치가 부도덕한 행위로 비칠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혈연관계가 없었다면 사뇨기타 납치에는 아무런 윤리적 장애가 없었던 셈이다.
결론 — 허구가 아닌 역사일 가능성
따라서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이 사뇨기타를 납치한 사건을 허구로 간주할 뚜렷한 근거는 없다. 프리트비라지의 왕비로 전해지는 파드마바티와 아지야에 대한 이야기에도 사랑 서사가 섞여 있으므로, 사뇨기타 납치 사건이 실제 역사였을 가능성은 오히려 커진다. 프리트비라지 왕이 사뇨기타를 납치해 결혼했을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차란(charan)과 바트 계열의 작가들도 파드마바티와 아지야와 관련해 같은 방식의 사랑 이야기를 엮어냈을 것이다.
요컨대, 로밀라 타파르와 그를 지지하는 역사가들은 확실한 근거 없이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의 사뇨기타 납치 이야기를 허구로 만들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트비라지 라소』와 기타 바트 문헌에서 제시된 프리트비라지와 자이찬드의 원한의 이유는 잘못된 것이다. 델리는 구박 2세의 아들 찬드라지 시대부터 차우한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다. 찬드라지는 토마르 왕 루드라팔을 물리치고 델리를 정복했으며, 루드라팔의 후손들은 차우한 왕가를 대신해 델리의 봉신으로 임명되었다. 서기 1155년에는 비그라하라자 4세가 델리의 토마르 왕 아낭팔을 격파하고 델리를 다시 차우한 왕가의 지배 하에 두었다. 따라서 자이찬드 왕이 델리에 대해 가질 권리는 전혀 없었으며, 이는 일부 문헌의 상상에 불과하다.
다음 이야기 예고 — 인도의 왕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튀르크인들이 인도 대륙에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 모한랄 굽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