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명문 파비우스 가문(Fabii) 출신인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Quintus Fabius Pictor)는 최초의 로마 역사가로 평가받으며, 폴리비오스에 의해 "scriptorum antiquissimus(가장 오랜 저술가)"라 칭해졌다. 조국을 사랑한 귀족이자 포에니 전쟁의 당사자였던 그는 후대 역사가들에게 최초의 1차 사료가 되었다.
파비우스 픽토르 가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파비우스 픽토르는 파비우스 씨족(gens Fabia)의 픽토레스(Pictores) 분파에 속한다. 파비우스 가문은 로마에서 가장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중 하나였으나, 기원후 34년 제정 초기에 집정관 명단(consular fasti)에서 자취를 감출 만큼 단명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로마에 독재관 6명, 집정관 46명, 감찰관 6명, 기병대장 6명, 호민관 14명, 십인위원회 위원 2명을 배출했다.
기원전 477년 크레메라 전투(Battle of the Cremera)에서 가문 전체가 전멸하는 비극을 맞았다. 어린 나이로 참전하지 않았던 퀸투스 파비우스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고, 그에게서 파비우스 가문의 맥이 5세기 동안 이어졌다.
그의 저명한 후손 중 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가 있다. 그는 화가(pictor)라는 뜻의 코그노멘 '픽토르'를 얻었는데, 로마 퀴리날레 언덕의 살루스 신전 벽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회화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예술에 크게 의존했고, 화가의 지위는 장인에 가까워 명문가 출신에게는 다소 천대받는 칭호였을 수 있다. 그의 두 아들 가이우스와 누메리우스는 각각 기원전 269년과 266년에 집정관에 올랐다.
신들의 사자, 퀸투스

기원전 254년경 태어난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는 가이우스의 손자다. 그의 생애는 폴리비오스, 에우트로피우스, 리비우스, 플루타르코스, 대 플리니우스 등의 기록을 통해 부분적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225년 갈리아족과의 전쟁에 참전했으나, 그가 진정으로 빛난 건 제2차 포에니 전쟁 때였다. 기원전 217년 6월 21일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Battle of Lake Trasimene)에서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대패했고, 이때 퀸투스도 참전했다.
같은 파비우스 가문의 다른 분파 출신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가 당시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반대파는 그를 '오비쿨라(새끼 양)'라 조롱했으나, 그의 전략을 이해한 이들은 '꾼크타토르(지연시키는 자)'라 칭하며 추앙했다.
로마의 열세를 간파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독재관에 임명되자 정면 충돌을 피하는 소모전 전략을 폈다. 이 전략은 초반에 비난받았으나, 칸나이 전투(Battle of Cannae)에서 로마 군단이 다시 궤멸된 뒤에야 비로소 받아들여졌다. 같은 시기, 두 명의 베스탈 처녀가 정절 서약을 어겼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한 명은 자살, 한 명은 생매장). 연이은 패배와 추문으로 로마는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고 판단했고, 시불린 서책(Sibylline Books)을 참조해 갈리아인 커플과 그리스인 커플을 생매장하는 인신공양을 치렀다.
신들을 달래려는 같은 의도에서, 당시 법무관(praetor)이던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는 델포이 신탁을 묻는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월계관을 쓰고 여사제에게 기도와 의식을 물었고, 리비우스에 따르면 모든 신에게 포도주와 향을 붓는 제주를 올렸다. 아폴론의 여사제는 그에게 월계관을 쓴 채로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배에서 내리지 말라고 명했다. 그리스 세계 최고 성지에서 돌아온 퀸투스는 아폴론 제단에 월계관을 바치고 신탁의 내용을 전했다.
"로마인들이여, 이 명령에 복종한다면 너희의 처지는 나아지고 편해질 것이며,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릴 것이다.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승리는 로마 인민에게 남을 것이다. 공화국이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 번영하면, 아폴론 퓌티오스에게 마땅한 제물을 바치고 전리품과 그 매각 대금에서 공물을 올리라. 그리고 오만함을 경계하라."
원로원은 이대로 실행할 것을 결의했다.
"가장 오랜 저술가", 퀸투스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의 문필 활동은 기원전 216~210년경 집필한 연대기(Annales)로 대표된다. 안타깝게도 이 저작은 단편만 전해지는데, 후대 역사가들이 모두 인용한 '일곱 왕의 명단'(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안쿠스 마르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이 그나마 남아 있다. 역사가들은 앞의 네 왕을 전설적 인물로, 뒤의 세 왕을 실재했던 군주로 본다.

하지만 퀸투스의 연대기는 리비우스(트라시메누스 전투 서술 등),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플루타르코스 등 수많은 고대 역사가들이 인용하고 활용했다. 리비우스 스스로 그를 "scriptorum antiquissimus"라 칭했듯, 그는 최초의 로마 역사가 중 한 명이었다. 로마 최고 가문 출신으로서 원로원 가문 문서고에 접근할 수 있었던 점이 강점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로마 건국 설화 등에서 디오클레스 오브 페파레토스(Diocles of Peparethos)라는 선배 그리스 역사가의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퀸투스는 디오클레스를 넘어 로마의 기원부터 당대까지 통사를 저술했다. 당연히 당대의 학문어였던 그리스어로 집필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는 소위 '로마 국사 소설'의 창시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특히 폴리비오스는 그가 로마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급급해 객관성을 상실했다고 질타했다. 폴리비오스는 역사가의 진실 규명 의무를 강조하며, 친카르타고 역사가 필리노스(Philinus of Agrigentum)와 퀸투스를 대비시켰다.
"그들이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도덕과 신념이 그런 의심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인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났다. 필리노스는 카르타고인들을 사랑해 그들에게 지혜, 신중, 용기를 부여하고 로마인들을 정반대로 묘사했다. 반면 파비우스는 이 모든 미덕을 로마인에게 주고 카르타고인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다른 상황이라면 이런 태도는 칭찬받을 만하다. 친구와 조국을 사랑하고, 친구가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자세다. 하지만 이는 역사가의 역할과는 양립할 수 없다. 역사가라면 적의 업적이 진정 훌륭할 때 칭찬해야 하고, 가장 가까운 친구라도 잘못이 있으면 가차 없이 비난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현대 연구서
- 프랑수아즈 비크-르콕, 공화정 시대 파비우스 씨족: 전설에서 역사로, 소르본 대학 박사학위 논문, 1986.
- 아르날도 모밀리아노, "파비우스 픽토르와 민족사의 기원", 현대 역사학의 고전적 기초,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 1990.
- 마리-피에르 아르노-랭데, 로마의 역사와 정치: 기원전 3세기~기원후 5세기 로마 역사가들, 포켓 아고라, 2001.
고대 사료
- 대 플리니우스: 박물지(Naturalis Historia)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Parallel Lives)
- 폴리비오스: 역사(Histories)
- 리비우스: 로마사(Ab Urbe Cond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