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사이리 투팍: 스페인과 화평을 맺은 빌카밤바의 두 번째 잉카

사이리 투팍(Sayri Tupac)은 빌카밤바의 두 번째 잉카였습니다. 1545년 아버지 만코 잉카가 알마그리스타파에게 암살당했을 때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습니다. 권력은 일시적으로 아토크 수파가 대행했는데, 그는 어린 사이리 투팍의 친척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쿠스코와 리마 사이를 오가던 상단에 산발적인 공격을 감행하며 스페인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548년 곤잘로 피사로의 반란이 진압되자 페드로 데 라 가스카는 사이리 투팍을 은신처에서 평화롭게 나오도록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이 임무를 위해 그는 삼촌인 파우루 잉카를 사절로 파견했는데, 제안을 전하는 사람이 잉카의 친척이라면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549년 7월 17일자 국왕에 보낸 편지에서 라 가스카는 이 임무의 실패를 한탄하며 협상이 중단된 채 남았음을 알렸습니다.

스페인 측의 협상 임무

이후 1550년부터 1556년까지 부왕 안드레스 우르타도 데 멘도사가 사이리 투팍을 은신처에서 나오게 하기 위한 교섭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멘도사는 후안 데 베탄소스(와이나 카파크의 딸 안헬리나 유판키와 결혼), 메스티소 후안 시에라(정복자 만시오 시에라 데 레기사모와 도냐 베아트리스 망고의 아들), 쿠스코 코레히도르 후안 바우티스타 무뇨스, 그리고 도미니코회 수사 멜cho르 데 로스 레예스로 구성된 협상단을 조직했습니다.

협상단은 아푸리막 강을 통해 빌카밤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추키차카 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연대기 작가 디에고 페르난데스 엘 팔렌티노에 따르면, 사이리 투팍은 협상단을 불신하여 자신보다 먼저 두 명의 지휘관을 파견해 출발 조건과 리마행 이송 문제를 협의하게 했다고 합니다. 사절들은 수도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부유한 가문들의 저택에 머물렀습니다. 부왕은 이들을 통해 사이리 투팍에게 그와 그의 자녀들에게 연금 1,000카스테야노스와 유퀘이 계곡의 엔코미엔다(영지), 그리고 "집을 짓기 위한" 쿠스코 요새 인근 토지를 제안했습니다.

후안 시에라는 지휘관들과 함께 빌카밤바로 돌아왔고, 사이리 투팍이 마스카이파차(잉카 왕권의 상징인 붉은 술)를 받았다는 소식, 즉 아토크 수파가 물러나며 완전히 권한을 승계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부왕의 제안이 수락되자 사이리 투팍은 빌카밤바를 떠나는 것이 공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구아카'(신성한 성물)들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557년 7월 그는 아내 쿠시 우아르카이와 함께 가마에 실려 300여 명의 호위 행렬을 거느리고 빌카밤바 요새를 영원히 떠났습니다. 이듬해 1월 5일에는 리마에 입성하여 카녜테 후작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그를 기리는 갈대 놀이 등 다양한 행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사이리 투팍의 쿠스코 귀환

사이리 투팍은 이후 쿠스코로 돌아와 유퀘이 계곡의 궁전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독교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는데, 본인은 디에고 데 멘도사라는 세례명을, 아내는 마리아 만리케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빌카밤바에 남은 잉카들은 그를 배신자로 여겼고, 그가 은신처를 떠나자마자 이복동생 티투 쿠시 우알파가 마스카이파차를 착용하며 새 지도자로 나섰습니다.

사이리 투팍의 죽음

사이리 투팍의 죽음은 미스터리에 싸여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스페인인들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빌카밤바의 잉카 세력을 의심합니다. 그의 동생 티투 쿠시 유판키는 자신의 기록에서 후안 데 베탄소스가 공증인과 함께 쿠스코에서 와서 동생이 자연사했음을 증명했다고 언급합니다.

어느 쪽이든 프란시스코 칠치라는 카냐리 출신 원주민이 약초로 사이리 투팍을 독살한 혐의를 받았으나, 아무런 증거도 입증하지 못한 채 1년간 구금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이리 투팍 사후 몇 년 뒤, 잉카 장군 리마치 유판키와 얌키 마이타는 잉카 서약 의식에 따라 사이리 투팍은 결코 잉카도, 만코 잉카의 정통 계승자도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1559년 6월 20일 빌카밤바에서 티투 쿠시가 구술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귀하께서는 이미 잉카, 즉 나의 주군이자 형제인 투파 아마로가 우리 아버지이자 주군 망고 잉카가 정하고 명하신 직계의 올바르고 참된 잉카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이리 투파 우리 형제는 대리자(잉카-랍틴)로서 우리 가운데 선택되어, 나의 주군 잉카가 우리를 다스릴 만큼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전사들이 다스리는 군주가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사이리 투팍의 출발이 빌카밤바에 대한 스페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반란 잉카들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