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헨리 피츠로이(Henry FitzRoy)와 로버트 캐리(Robert Carey)는 누구였을까?

튜더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두 명, 헨리 피츠로이와 로버트 캐리 경의 삶을 살펴봅니다. 한 명은 왕의 사생아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다른 한 명은 궁정과 전장, 정계를 넘나든 다재다능한 신사였습니다.

헨리 피츠로이(Henry FitzRoy), 리치먼드·서머셋 공작(1519–1536)

헨리 피츠로이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가 정부(情婦) 엘리자베스 블라운트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였습니다. 1519년 6월에 태어난 그는 불과 여섯 살이던 1525년 6월 18일, 리치먼드·서머셋 공작(Duke of Richmond and Somerset)과 노팅엄 백작(Earl of Nottingham)에 봉해지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는 훗날 각각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복 누나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에게 이복 남동생으로 여겨지고 대우받았습니다. 국왕은 아들의 양육에 아낌없이 투자했으며, 그의 가정에는 노포크 공작 3세 토머스 하워드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1529년, 헨리 8세는 피츠로이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블라운트를 길버트 테일보이스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그녀가 이를 거부하자 런던탑 감금을 명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곧 석방되었습니다.

1533년 초, 피츠로이는 당시 국왕의 유일한 적법한 자녀였던 메리 튜더와 잠시 약혼하기도 했습니다. 이 혼담은 원래 1521년 헨리 8세가 처음 제안한 것이었으나, 1522년 교황은 적법한 자녀와 사생아 사이의 사촌 결혼에 대한 특별 허가(교회의 공식 승인)를 거부한 바 있었습니다.

1533년 12월, 마침내 귀족원(House of Lords)에 이 결혼을 허용하는 법안이 상정되었고, 이번에는 통과되었습니다. 이어 1534년 3월 25일, 헨리 8세는 아들에게 리치먼드·서머셋 공작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피츠로이는 1536년 7월 23일, 17세의 어린 나이에 발한열(sweating sickness)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전염병은 국왕 본인을 매개로 궁정 사람들 사이에 번졌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그는 결혼하지 못한 채 요절했고, 그의 작위는 사후 소멸되었습니다. 임종 자리에서 헨리 8세는 "오늘 고귀한 왕자를 잃다니, 실로 크나큰 손실이다!"라고 탄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버트 캐리 경(Sir Robert Carey, c. 1560–1639)

로버트 캐리 경은 잉글랜드의 궁정인이자 군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헌즈던 남작 1세 헨리 캐리의 아들이었습니다.

캐리는 잉글랜드 허트퍼드셔주의 헌즈던 하우스에서 태어나 웨스트민스터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588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침공으로부터 베릭어폰트위드(Berwick-upon-Tweed)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1589년에는 버킹엄 선거구의 하원 의원(MP)으로 선출되어 1601년까지 하원에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1600년에는 와이트섬 총독(Captain of the Isle of Wight)에 임명되어 1639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캐리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와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의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두 왕의 추밀원(Privy Council) 의원을 지냈습니다. 특히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서거했을 때, 캐리는 말을 몰아 밤낮없이 에든버러까지 질주하여 제임스 6세에게 새 왕 즉위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벤 존슨과 깊은 친분을 나누었으며, 미니어처 화가 니콜러스 힐리어드의 작품 활동 역시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캐리는 1639년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