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베켓의 죽음, 기사들에게 책임이 있었던 이유
1170년 12월 29일, 캔터베리 대성당 제단 앞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오랫동안 대립해 온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이 네 명의 기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중세 유럽 전체에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대체 누구에게 책임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왕의 분노, 기사들의 착각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헨리 2세가 내뱉은 격분의 발언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이 성직자를 없애 줄 사람은 없는가(Will no one rid me of this turbulent priest?)"라는 말을 들은 기사들은 이를 곧바로 왕의 살해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실제로 왕이 처형을 명령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사들은 왕의 뜻을 좇는다고 믿으며 움직였고, 그 결과 베켓은 대성당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네 명의 기사
베켓을 직접 살해한 이들은 레지널드 피츄르스(Reginald FitzUrse), 휴 드 모르빌(Hugh de Morville), 윌리엄 드 트레이시(William de Tracey), 리처드 르 브르통(Richard le Breton) 등 네 명의 기사였습니다. 이들은 무장한 채 대성당에 난입해 베켓을 끌어내려 했고, 그가 거부하자 그 자리에서 그를 공격해 죽였습니다. 칼을 휘두른 실행자가 바로 이들이었기에, 역사적으로 가장 무거운 책임은 기사들에게 돌아갑니다.
명령의 출처를 둘러싼 논란
흥미로운 점은, 기사들이 스스로 따르는 명령이 국왕에게서 직접 내려온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설에 따르면 이들은 당시 켄트 지역의 유력 인물이었던 로버트 드 브록(Robert de Broc)을 '주군'으로 여기며 그의 지시를 따랐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브록 가문은 베켓과 재산 문제로 오랜 갈등을 빚어왔고, 기사들이 살해 전 브록 가문의 솔트우드 성(Saltwood Castle)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이런 해석에 무게를 더합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명확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합니다. 기사들이 정확히 누구의 명령을 받았다고 믿었는지, 왕의 발언이 어떤 경로로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기사들만을 단독 배후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역사가 남긴 평가
결국 교회는 네 명의 기사를 파문했고, 이들은 참회의 표시로 성지 순례를 떠나야 했습니다. 헨리 2세 역시 공개적인 참회 의식을 통해 간접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희생된 베켓은 1173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캔터베리 대성당은 이후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순례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리하면, 직접 손을 더럽힌 실행자였다는 점에서 기사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다만 그들이 왕의 명령을 받았다고 믿었는지, 아니면 브록 가문 같은 주변 세력의 영향 아래 움직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책임의 범위를 두고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