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658년 사구 전투: 튀렌 vs 대콩데, 프랑스-스페인 25년 전쟁의 종막


1658년 사구 전투: 튀렌 vs 대콩데, 프랑스-스페인 25년 전쟁의 종막1658년 6월 14일 벌어진 사구 전투(Bataille des Dunes)는 25년에 걸친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종막을 알린 결정적 교전이었다. 튀렌(Turenne)이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마침내 오랜 숙적 스페인군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리고 스페인 진영의 지휘관 중 한 명은 다름 아닌 전직 프롱드 반군, 대콩데(Grand Condé)였다. 프랑스군의 승리로 루이 14세 시대 유럽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프랑스-스페인의 오랜 경쟁

1635년 이래 프랑스와 스페인 왕국은 극심한 갈등을 이어왔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공격하면서 전쟁의 포문이 열렸다.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30년 전쟁의 일부이지만, 프랑수아 1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두 왕국의 치열한 패권 경쟁이 정점에 달한 사건이기도 하다. 승자는 유럽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과정에서 보듯, 전쟁의 첫 국면은 부르봉 왕가에 유리하게 흘렀다. 프랑스는 알자스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면서 주도권은 다시 스페인 쪽으로 넘어갔다. 이 혼란의 시기(1648~1653)에 프랑스의 처지는 극도로 위태로웠다. 모후 오스트리아의 안이 섭정을 맡은 어린 루이 14세는 여러 차례 프롱뢰르(Frondeurs)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섭정정의 수상이자 리슐리외의 반(反)스페인 노선을 계승한 마자랭 추기경은 두 차례나 강제 추방당했다.

콩데 대 튀렌

프롱드를 지원했던 스페인은 1653년 반군의 패배가 확정되자 생존한 군대와 지도자들을 자국 진영으로 받아들였다. 추방된 프랑스 귀족들의 선두에는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 콩데 공 루이 2세가 서 있었다. 로크루아 전투(1643)의 승자인 이 왕족 출신의 왕자는 어린 루이 14세에게 자신의 위상을 인정받지 못하자 반군에 합류하게 된다. 사실 콩데는 초기 프롱드 세력이 아니었다. 왕이 여전히 마자랭을 자신보다 신뢰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야 반군 진영에 섰다. '대콩데'라 불릴 만한 그는 대담한 기병 돌격으로 명성을 떨친, 불같이 성격 급한 장군이었다. 이후 1653년부터 그는 스페인 왕을 섬기며 최대의 라이벌인 튀렌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역시 유럽에서 가장 명문인 가문 중 하나에 속한 '대귀족'이었다. 그러나 개혁파 교육을 받은 그는 콩데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프롱드에 가담했던 그가 마자랭 진영으로 돌아선 뒤에는 프랑스 주력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콩데의 격정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체계적이고 냉철한 전쟁 수행 능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구 전투

1653년부터 1658년까지 콩데와 튀렌은 플랑드르 전선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다. 1658년 봄, 전세는 스페인에게 불리하게 기울어 있었다. 크롬웰의 잉글랜드와 연합주(오늘날 네덜란드)와 강력한 동맹을 맺은 프랑스가 주도권을 쥐고 전략적 항구 덩케르크를 포위할 수 있었다.

1658년 사구 전투: 튀렌 vs 대콩데, 프랑스-스페인 25년 전쟁의 종막튀렌의 군대는 신모범군(New Model Army) 소속 잉글랜드 병사 3,000명을 포함해 약 2만 명에 달했다. 반면 레데 후작이 지휘하는 3,000명의 스페인 수비군으로는 오랜 포위를 견디기 어려웠다(바다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태였다). 이에 스페인은 포위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한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 호세와 콩데가 지휘하는 이 군대는 약 1만 5,000명으로, 상당수가 프랑스인이었고 2,000명에 가까운 잉글랜드 왕당원—스튜어트 왕가를 지지하는 병사들—도 함께 싸우고 있었다. 여러모로 이 전투는 동족상잔의 양상을 띠게 된다.

포위 임무를 일부 부대에 맡길 위험을 무릅쓰고 튀렌은 스페인 구원군을 맞으러 나섰다. 스페인군은 6월 13일, 전투의 이름이 된 모래 언덕 한가운데인 르프린퀴크(Leffrinckoucke) 인근에 도착했다. 콩데와 돈 후안 호세의 군대는 산발한 전열로 전투를 시작해야 했고, 포병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 8시경 전투가 시작되자 스페인군은 록하트 경(Lord Lockhart)이 이끄는 잉글랜드 창병들의 맹공격에 직면했다. 이들은 집중적인 머스킷 사격에도 불구하고 정예병으로 가득 찬 요새화된 사구를 공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돈 후안 호세 군단의 중앙과 우익은 무너져 내렸다. 튀렌은 조수가 밀려나면서 열린 해변을 따라 기병대를 진격시켜 스페인군의 측면을 찔렀다. 돈 후안 호세 부대의 설상가상으로, 영국 호위함들이 그들의 진지를 포격했다.

1658년 사구 전투: 튀렌 vs 대콩데, 프랑스-스페인 25년 전쟁의 종막콩데가 이끄는 스페인 좌익만이 버텼다. 그는 병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기병 선두에서 세 차례나 돌격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콩데' 역시 전투의 패배를 직감했다. 그의 돌격은 돈 후안 호세 군대의 피할 수 없는 후퇴를 엄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전투는 단 2시간 만에 끝났다. 스페인군의 손실은 포로 4,000명을 포함해 약 5,000명에 달했다. 반면 튀렌이 잃은 병력은 대부분 잉글랜드 병사인 400명에 불과했다.

스페인의 몰락, 프랑스의 대두

이 승리의 결과는 즉각 나타났다. 6월 25일 덩케르크는 프랑스의 손에 넘어갔고, 프랑스는 크롬웰과의 동맹 조건에 따라 이 도시를 잉글랜드에 양도했다(잉글랜드는 1662년 이를 루이 14세에 되팔았다). 이제 루이 14세의 군대는 브뤼셀까지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은 1659년 11월에 체결될 유명한 피레네 조약을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4세의 영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튀렌의 승리에 합당한 포상을 아끼지 않았던 태양왕은 그럼에도 콩데를 용서한다. 이후 사구 전투의 두 주인공은 다시 한번, 그들이 함께 싸웠던 군주 곁에서 나란히 복무하게 된다…

참고문헌

- John A. Lynn, 『루이 14세의 전쟁: 1667~1714』, 페랭(Perrin),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