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5월 9일, 러시아 '승전 기념일'의 이면 이야기

'승전 기념일(Victory Day)'은 러시아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국경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 독일을 상대로 거둔 피로 물든 승리를 기념하는 날로, 당시 800만 명이 넘는 소련 군인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올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이 날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 이후,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백만 명을 고향에서 쫓아낸 이 전쟁에서 올해의 '승전 기념일'이 전환점이 될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끊이지 않았다.

3월에는 우크라이나 언론 '키이우 인디펜던트(Kyiv Independent)'가 러시아군에 전쟁을 반드시 5월 9일까지 끝내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고, 최근에는 미국과 서방 관계자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단순한 '특별 군사 작전'이라 부르던 이번 사태를 5월 9일부로 공식적인 전쟁으로 선포할지 여부를 두고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5월 1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모스크바 타임스(Moscow Times)에 따라 "우리 군은 승전 기념일을 포함한 그 어떤 날짜에 맞춰 작전을 조정하지 않는다"며 "언제나 그래왔듯 5월 9일에 공식적으로 기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러시아와 구소련 공화국들의 해방, 그리고 유럽을 나치 재앙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겠다"고 덧붙였다.

5월 9일, 러시아  승전 기념일 의 이면 이야기

푸틴 정치에 새겨진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논리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며 이 나라를 '비나치화(de-Nazification)'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에 유대인 출신 대통령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이 주장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국가가 자국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연합국은 프랑스 랭스에서 나치의 항복 문서가 조인된 것을 기념해 5월 7일을 '유럽 승전일(V-E Day)'로 정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이 장악한 베를린에서 열릴 항복식까지 기다렸다. 항복 문서가 한밤중에 서명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이 되어 있었다.

타임(TIME)지가 이전에 보도했듯이, 1960년대 소련 지도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5월 9일을 군사 퍼레이드가 열리는 국경일로 지정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이를 매년 열리는 행사로 정착시켰고, 푸틴 집권 아래에서는 수십만 명의 관중이 탱크와 미사일이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모여들었다.

승전 기념일을 맞으면 광고판과 버스에는 때때로 스탈린의 초상이 내걸리기도 했다. 또한 수천만 명의 러시아 시민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가족의 초상을 들고 모스크바 거리를 행진해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대학교의 이반 쿠릴라(Ivan Kurila) 교수는 2018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중 가족의 희생을 기리는 일이 "러시아에서 통합된 사회를 형성하는 거의 유일한 사회적 접착제"라고 말한 바 있다.

축제 뒤에 감춰진 진실

물론 승전 기념일 축제가 실은 냉엄한 진실을 가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전문가들은 '승전 기념일'이 단순히 러시아의 과거 군사적 성과를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러시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결집하고 러시아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언론인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Andrei Kolesnikov)는 2017년 기고문에서 '승전 기념일'의 현대적 의미가 푸틴의 러시아 역사관에서 '핵심적'이라며, 제2차 세계대전은 '위대한 애국 전쟁'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고 썼다.

그는 "이 승리의 유일한 후계자를 자처하는 현재 정권은 이 업적을 활용해 다른 문제에 대한 비판을 면역처럼 차단하고, 현재의 군비 확장 노력과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과도한 국가 개입을 정당화한다"고 적었다.

또 그는 "공식적 인식 속에서 1945년 러시아의 승전 기념일은 명목상 전쟁 희생자를 함께 애도하는 자리일 뿐이다. 실제로는 더 군사화되고 호전적인 유형의 러시아 지도자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유엔에 따르면 나치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는 바로 오늘까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미 500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유엔은 전쟁이 종결될 무렵에는 피난민이 8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