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대결인 요크타운 전투, 정확히는 요크타운 포위전은 미국 독립 과정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에서 경보병 사단을 지휘하기 위해 일찍이 반군을 돕겠다고 건너간 라파예트 후작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의 진정한 기여는 루이 16세가 지원한 막대한 군자금, 로샹보 백작이 이끈 1만 명 규모의 정규 원정군, 그리고 드그라스 제독의 함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공헌의 정점에는 바로 '요크타운'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배경: 미국 독립전쟁
17~18세기에 걸쳐 설립된 영국령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대서양 연안을 따라 자리 잡았으며, 1750년경 인구는 약 120만 명에 달했습니다. 각 식민지는 잉글랜드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했지만, 코네티컷·펜실베이니아·메릴랜드·로드아일랜드 네 곳은 지방 의회를 선출해 사실상 자치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물론 모든 식민지는 형식적으로 영국 왕관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은 신대륙의 프랑스령 뉴프랑스 영토를 회수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새로운 영토를 왕실 재산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전쟁 비용마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전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영국 의회에 선출된 대표가 없다는 이유로 새로운 세금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런던이 인지세법(Stamp Act)을 시행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767년에는 차를 포함한 생필품에 각종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 법(Townshend Act)으로 이를 대체했습니다.
문제는 동인도회사가 이 차 세금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불공평함에 분노한 식민지인들은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선박에 실린 10만 파운드 어치의 차 화물을 탈취해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라는 아이러니한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사건은 런던의 강경한 대응을 불러왔습니다. 병사들이 질서 회복을 위해 파견되었고, 반란 지역 영토 일부를 캐나다에 편입하는 퀘벡법을 비롯해 식민지인들이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이라 부르는 여러 법령이 반포되었습니다.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회의에서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영국 의회의 일방적 결정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인하는 '권리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근교 렉싱턴에서 매사추세츠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독립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3개 식민지의 무장 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반군은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지명된 조지 워싱턴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식민지 대표 회의는 독립선언문을 채택하며 영국 왕관에 대한 종속에 최종적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전쟁에 뛰어든 프랑스
이 무렵부터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이 시작되었습니다. 1777년 6월, 라파예트 후작은 프랑스 장교단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병력 훈련과 무기·장비 수송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약 4만 명밖에 동원하지 못해 게릴라전에 시달리던 영국군을 상대로 반군은 승리를 거두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의미 있는 승리는 1777년 10월 17일의 새러토가 전투였습니다. 미군은 영국군 5천 명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승리로 대다수 식민지 주민들이 독립전쟁에 결집했고, 전쟁의 개연성이 입증되면서 프랑스의 관심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프랑스에게 이 전쟁은 영국에 대한 복수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피뢰침의 발명가로도 유명합니다)이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드 베르젠에게 직접 접촉했고, 베르젠은 루이 16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1778년 '우호 조약' 체결과 함께 프랑코-아메리카 관계가 공고해졌으며,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데스탱 제독이 지휘하는 17척 규모의 프랑스 함대가 처음으로 미국으로 항해했지만 결정적 우위를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두 해 후, 로샹보 백작이 6천 명의 부대를 이끌고 로드아일랜드에 상륙하며 미국 독립전쟁 지원 작전에 나섰습니다.
체서피크만의 프랑스 해군 승리와 요크타운 포위전
1781년, 전쟁은 이미 5년째 계속되고 있었고 왕당파와 영국군은 13개 식민지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천 명, 즉 영국군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을 이끈 콘월리스 장군이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로샹보와 워싱턴은 이 지역이 육상으로는 쉽게 봉쇄될 수 있고, 체서피크 만 입구를 함대가 막으면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서인도제도에 있던 드그라스 제독의 24척 함대가 바로 이 결정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9월 5일, 프랑스 해군 역사에 드물게 기록될 진정한 해상 승리가 펼쳐졌습니다. 살상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호드 제독의 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임을 깨닫고 궤멸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철수를 선택했습니다.
요크타운은 9월 28일부터 포위에 들어갔습니다. 워싱턴의 6천 명, 로샹보 원정군의 5천500명, 여기에 생시몽 후작의 병력과 라파예트의 부대까지 합쳐 총 1만6천 명의 프랑코-아메리카 연합군이 형성되었습니다. 로샹보가 프랑스 야포를 끌어들이자 포격이 요새를 사정없이 두들겼고, 프랑스 공병들이 참호를 팠습니다. 영국군 역시 여러 차례 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수 주간의 포위전 끝에 샤를 드 라메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첫 번째 방루(redoute)들을 함락시켰고, 마지막 돌격은 라파예트 후작이 이끌었습니다. 그의 병력들은 총검을 장착한 채 돌진해 마지막 방루들과 가장 강력한 영국 포대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1781년 10월 19일 영국군이 항복할 때, 로샹보 백작은 콘월리스의 부관 오하라 장군이 바친 항복의 검을 받지 않고 조지 워싱턴에게 전달하도록 배려하는 우아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크타운 전투의 여파
어느 면에서 구체제의 마지막 위대한 승리라 할 수 있는 요크타운 전투의 결과는 지대했습니다. 콘월리스의 항복은 영국의 전쟁 피로감을 극대화해 미국 독립을 확정지었습니다. 패전 소식이 런던에 전해지자 노스 경 내각은 곧바로 무너졌고, 평화파가 주도권을 잡아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이어지는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반면 프랑스에게 1763년 굴욕적인 캐나다 상실에 대한 '복수'의 대가는 특히 컸고, 그 대가로 돌려받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프랑스의 기억보다 오히려 미국인들의 기억에 훨씬 깊이,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남게 되었습니다.
더 읽을거리
- Raymond Bourgerie, Pierre Lesouef, 『Yorktown (1781)』, Economica, 1992
- The French in America during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7-1783
- Jean-Yves Delitt, 『The Great Naval Battles: Chesapeake』, BD Glénat,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