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립,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의 대결사에서 가장 유명한 승리를 꼽으라면 단연 퐁트누아 전투(Battle of Fontenoy)다. 이 전투는 "영국 신사들이여, 먼저 쏘시오!"라는 유명한 일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745년 5월 6일, 루이 15세는 도팽(황태자)을 대동하고 베르사유를 떠나 투르네(Tournai)의 항복을 지켜보기 위해 2km에 달하는 1,00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행진했다. 왕은 작은 마을 퐁트누아에 머무르며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퐁트누아 전투의 무대, 투르네 지역
스헬더 강(에스코 강)을 끼고 있는 투르네는 플랑드르 평야와 헨트, 안트베르펜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5세기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다가 플랑드르 백작령에 편입되었고,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 때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후 카를 5세(Charles Quint)가 정복했고, 루이 14세가 탈환했다가 오스트리아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1745년 이 원정에서 마침내 프랑스가 다시 차지하게 된다.
당시 루이 15세는 사방에서 전쟁에 직면해 있었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4년 3월 영국 국왕과의 전쟁, 4월에는 헝가리 여왕(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선전포고했다. 전장은 북부로 정해졌고, 왕은 군 지휘권을 삭스 원수(Maréchal de Saxe)에게 맡겼다. 삭스 원수는 먼저 투르네를 공략하기로 했다. 투르네는 병원 등 군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병력을 먹이고 재우기에 충분했다. 작전 계획은 1744년 12월 수립되어 이듬해 봄 실행에 옮겨졌다: 북부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몽(Mons)과 샤를루아(Charleroi) 방면으로 양동 작전을 펴는 척하다가 갑자기 투르네로 진격해 네덜란드군을 기습한다는 계획이었다.
삭스 원수의 치밀한 준비
1745년 4월 6일, 모리스 드 삭스(Maurice de Saxe)는 릴(Lille)에서 10만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한편 컴버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은 5만 5천 명의 하노버,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을 이끌고 오스텐데(Ostende)에 상륙했다. 컴버랜드는 프랑스군이 아르망티에르(Armentières)와 모브주(Maubeuge) 사이에 집결한 것을 보고 몽과 샤를루아 공격으로 판단했다. 연합군은 아우데나르데(Oudenaarde)의 수문을 닫아 헨트 방면으로, 스헬더 강 우안을 콩데쉬레스코(Condé-sur-l'Escaut)까지 약 60km 범위를 침수시켰다.

4월 25일, 프랑스군 6천 명이 투르네 앞에 출현하며 적을 놀라게 했다. 이튿날 삭스 원수는 6만 병력으로 본격적인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4월 28일, 컴버랜드 공작은 투르네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군 배후를 치고 이들을 도시 쪽으로 몰아넣어 섬멸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삭스 원수는 이미 이를 간파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컴버랜드의 행동은 빨랐으나, 스물다섯 살의 젊은 공작이자 지휘관을 시기하는 부하들의 비협조로 군대는 30일에야 브뤼셀을 출발했다. 고작 70km 거리인 투르네까지 9일이 걸렸고, 이 시간은 삭스 원수에게 결정적인 준비 기간이 되었다.
삭스 원수는 투르네 포대 사정거리 밖인 퐁트누아 평야를 전장으로 택했다. 이곳은 스헬더 강을 등지고 한 변이 약 1.5km인 정방형 지형으로, 북쪽의 바리 숲(Bois de Barri)과 남쪽의 스헬더 강 사이에 마을이 있어 양쪽 전선만 공격 가능했다. 완만한 경사지는 적의 진격을 오르막으로 만들어 방어에 유리했다.
동시에 병력을 재편했다: 2만 명은 포위전 유지, 4만 명은 퐁트누아로 투입. 바리 숲에 장애물(abattis)을 설치하고 마을을 요새화했으며, 북쪽에는 레두트(소규모 요새)를 쌓아 군세를 엄호하고 남쪽으로는 퐁트누아와 앙투앙(Antoing) 사이를 차단했다. 보병과 기병을 좌익(바리 숲 쪽)과 우익(스헬더 강 쪽)에 배치했다.
마을 요새화는 보방(Vauguyon) 백작에게 맡겼고 8문의 대포, 두 개 대대와 두 개 포병대가 바리 숲 레두트에 배치되었다. 주력 보병은 퐁트누아와 숲 사이 레두트 사이에 4열로 진을 쳤다(도팽 연대와 보베지 연대 소속 430명의 노동자가 20시간 만에 참호를 완성). 후방에는 '기병 2열', 그 뒤에 '메종 뒤 루아(Maison du Roy, 왕실 근위대), 장데마리(Gendarmerie), 8개 카라비니에 중대'가 예비대로 포진했다.
퐁트누아 전투의 전개
5월 10일, 모든 준비가 끝났다. 프랑스군은 컴버랜드의 5만 5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은 퐁트누아 맞은편 베종(Vezon) 마을에 진을 쳤고, 우익은 바리 숲, 좌익은 스헬더 강에 닿아 있었다." 네덜란드군이 부르종(Bourgeon) 마을을 공격해 왔으나, 참호 속 소수 프랑스군은 위치를 포기했다. 밤사이 안개를 틈타 삭스 원수는 퐁트누아에 6문포 증원을 보냈다.

5월 11일 새벽 4시, 국왕과 도팽은 분주히 움직였고 "동이 트자 적군이 정연하게 국왕의 군대를 향해 전진해 왔다."
오전 6시 직전, 연합군의 포격이 시작되고 프랑스군도 응사했다. 그라몽 공작(Duke of Gramont)이 전사했다.
네덜란드군이 퐁트누아와 앙투앙 사이를 다시 공격했다. 오전 9시, 퐁트누아 사정권에 진입한 적과 30분간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돌격해 온 적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삭스 원수는 루아얄(Royal) 여단과 쿠론(Couronne) 여단으로 마을 후방을 지켰다.
8천 명의 앵글로-하노버 연합군이 전진하며 손실을 입었으나 소용없었다. "영국군이 퐁트누아를 세 번 공격하고 네덜란드군이 앙투앙을 두 번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컴버랜드는 작전을 바꿔 바리 숲 레두트와 퐁트누아 사이의 좁은 틈을 노렸다. 보병을 '두 줄의 밀집 대형, 제3열은 예비대', 기병을 제4열로 재편해 총 1만 5천 명의 압축된 돌격대를 만들었다.
양군이 대치했다. 이곳에서 유명한 말 "영국 신사들이여, 먼저 쏘시오"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당시 보병 교전 규칙상 선제 사격을 하지 않은 쪽이 근접전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의 일제 사격은 프랑스군 제1, 2열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전진했다. 프랑스 전 군종이 뒤섞여 반격하며 피해를 입혔으나 영국 기둥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프랑스 근위대와 스위스 근위대마저 흩어지며 영국 기둥이 퐁트누아 후방으로 돌파하려던 순간, 삭스 원수는 기병을 재차 투입했다. 영국 기둥은 타격을 입으면서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오후 1시경, 프랑스군은 위기에 몰렸다. 왕의 측근 여러 명이 스헬더 강 건너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왕은 거절했다. 그것이 패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쥐베(Jubé)의 기록에 따르면 "왕자는 이 위급한 순간에 큰 침착함과 자신감을 보였고, 그 표정만으로도 병사의 사기를 북돋웠다. 몇 발의 포탄이 그가 있던 고지 근처에 떨어지자 루이 15세는 웃으며 말했다. '저것들을 적에게 돌려보내라, 나는 그들의 것을 원치 않노라!'"
삭스 원수는 메종 뒤 루아를 포함한 모든 예비대를 투입해 영국 기둥의 정면과 양 측면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마상 척탄병이 첫 칼부림을, 프랑스 근위대가 첫 총검 돌격을 가했고, 도팽 전하께서 칼을 뽑아 패주하던 병력을 수습해 적진으로 돌격하셨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기둥이 멈칫하더니 흔들리고 붕괴되었다. 순식간에 8천에서 1만 명에 달하던 영국 기둥이 괴멸했다." 1745년 5월 11일 오후 2시였다. 컴버랜드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퇴각했고, 삭스 원수는 3천 명을 추격에 보냈다. 승리를 확인한 루이 15세는 오후 7시경 철수했다.
승리의 귀속과 평가
프랑스군 피해는 7,000~7,500명, 영국·하노버·네덜란드 연합군은 13,000~15,000명으로 추산된다.
승리는 프랑스의 것이었으나 공로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루이 15세는 삭스 원수에게 돌렸고, 장군 쥐베는 볼테르가 리슐리외 공작(Duc de Richelieu)의 진언이라 주장한 방식에 의한 승리라 했다. 반면 J.P. 부아(Bois)는 "이 전투 하나로 삭스 원수는 당대 최고의 군재(軍才)임을 증명했다"며 모리스 드 삭스의 독보적 공로로 본다.
참고 문헌
- 프레데릭 겔통(Frédéric Guelton) 대령, 육군 역사 연구부장, 역사가. "퐁트누아 전투", 잡지 "샤토 드 베르사유: 앙시앵 레짐부터 현재까지" 게재
- J.P. 부아, "퐁트누아 1745: 루이 15세, 유럽의 중재자", 1996
- 드니 강딜롱(Denis Gandilhon), "전투와 인간: 퐁트누아", 이스토와르 에 콜렉시옹(Histoire & Collections),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