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도중 지휘권을 부여받은 필리프 도를레앙(Philippe d'Orléans)은 1706년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이 되었지만, 무능한 참모들에게 둘러싸인 채 토리노 포위전이라는 참사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루이 14세 통치 기간 중 가장 긴 분쟁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의 발단은 1700년 11월 1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서거였습니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이 전쟁은 13년간 지속되며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1706년 5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토리노 포위전입니다.
토리노 포위전의 배경
루이 14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습니다. 펠리페 4세는 재혼하여 오스트리아의 마리 아나와 결혼했고, 이 혼인에서 살아남은 자식은 단 한 명, 즉 카를로스 2세뿐이었습니다. 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 스페인 왕국은 프랑스로 넘어가야 했지만, '태양왕' 앞에는 여러 왕위 주장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인판타 마리 아나 데 아우스트리아의 손자로서, 세 번째 혼인에서 얻은 아들 카를에게 스페인 왕위를 원했습니다.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역시 선조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아내에게 지급되지 못한 혼수를 근거로 왕위 계승 경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유언장을 통해 루이 14세의 조카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정했습니다. 이로써 프랑스와 스페인은 하나의 강대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보이아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국경에 인접한 밀라노가 스페인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30년간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사보이아 공작은 동맹 관계 재편을 협상합니다. 잉글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덴마크가 연합하여 프랑스·스페인 동맹에 맞서는 것입니다.
1703년 여름이 끝무렵, 루이 14세는 사보이아 공작이 진영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군대 사령관이 올랭프 망시니의 아들인 사보이아카리냐노 출신 외젠 친공(Prince Eugène de Savoie-Carignan)이었던 만큼 배신은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졌습니다. 1702년 2월 크레모나 전투 이후 방돔 공작은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산베네데트포 진영에서 피에몬테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일부는 스페인 감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독일로 보냈습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합니다.
토리노 포위전의 전개
1704년부터 1705년까지 프랑스군에게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방돔 공작이 이끄는 군대는 카사노다다 전투, 그리고 칼치나토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토리노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방돔 공작을 대신한 라푀이야드 원수는 1706년 5월, 스페인군 5,000명을 포함한 총 44,000명의 병력과 대구경 포 110문, 유탄 박격포와 선회포 59문을 이끌고 토리노 성 앞에 나타났습니다. 적군은 겨우 10,000명과 200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지난겨울 동안 병사들은 시타델라(요새)를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방벽을 구축해 두었습니다.
라푀이야드는 처음부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군사 건축의 대가 보방(Vauban)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지형 정찰을 하지 않은 채 시타델라를 직접 공격한 것입니다. 1706년 8월 27일 시타델라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한 시, 다섯 발의 포성이 공격 개시를 알렸다. 이어 수많은 박격포가 일제히 발사되어 돌과 폭탄의 비를 쏟아부었고, 참호에서는 수백 명의 프랑스 보병이 엄폐물용 다발과 사다리를 들고 달려 나왔다." 프랑스군은 흙과 양모 자루로 방어된 성벽과 외곽 방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대포와 머스킷 총격을 받으며 그들은 총검으로 응수했지만, 빠르게 해자로 밀려났습니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그들은 탄약고 폭발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재차 공격을 시도할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프랑스군 2,000명이 사상당한 반면 피에몬테군의 사상자는 겨우 450명이었습니다. 상이병과 전사자를 회수하기 위한 휴전 요청도 외젠 친공에게 거부당했습니다. 피에몬테군의 화약이 곧 고갈될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방어선을 가까이서 살피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젠 친공은 해자의 부상자들 위에 최대한 많은 장작을 던지라고 명령했고, 해 질 녘 두 시간 전 "시타델라 수비군의 진지와 프랑스군 돌격 참호 사이에 불의 장막이 솟아올랐습니다." 8월 30일, 프랑스군이 26,000명으로 줄어든 시점에서 필리프 도를레앙이 롬바르디아에서 추가 병력 18,000명을 이끌고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프랑스군의 손실은 커져만 갔습니다.
프랑스군의 패배
포위전 116일째 되던 날인 1706년 9월 6일, 비토리오 아메데오가 총 24,000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도착했습니다. 그는 좌익에, 외젠 친공은 중앙과 우익에 자리 잡고 다음 날의 공격 계획을 세웠습니다. "내일,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는 정해진 방식과 다음 순서에 따라 적진을 향해 진격한다. 일출 한 시간 전, 호령에 따르지 않고 기병은 말에 안장을 얹고, 보병은 북소리 없이 곧바로 행진 준비를 마쳐 일출 시 전군이 진격할 준비를 갖추도록 한다. 보병은 여덟 개 종대로 나뉘고, 모든 척탄병은 프로이센 보병 앞에서 행진한다. 야포는 제1열 대대 사이에 위치하며, 누구도 장교의 명령 없이 발포하지 않는다."
"보병이 적진에 자리 잡은 후, 기병은 보병이 남긴 틈을 통해 이동하여 즉시 돌격하고 보병과 함께 적을 추격해 재집결할 시간과 수단조차 빼앗는다. 후사르는 좌익 앞에서 행진하며 이미 임무에 대한 명령을 받았다..."
9월 7일 아침, 프랑스군 22개 대대와 54개 기병 중대는 52개 대대와 99개 기병 중대와 맞서야 했습니다. 두 시간의 포격 끝에 적의 좌익이 공격을 개시했고,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우익에서 양동 작전을 펼쳤습니다. 프랑스군의 진영은 와해되었고, 총공격에 밀려 첫 번째 후퇴를 감행합니다. 그리고 성의 총독이 병력 1,500명과 기병 500명을 추가로 내보내기로 결정하자, 프랑스군은 완전히 물러났습니다. 마르사유(Marsaille)에서 프랑스 후위는 경기병 1,500기의 공격을 받아 사망, 부상, 포로 2,000명을 남기고 패주했습니다. 피니롤(Pignerol)에서 프랑스군이 재집결할 때 14,000명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반면 적군의 사상자는 3,246명에 불과했습니다!
결과와 영향
1713년 4월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이 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루이 14세는 비토리오 아메데오에게 수사 계곡, 울스와 바르도네키아 계곡, 브리앙송 지구, 케이라 계곡을 할양했습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이렇게 분쟁 초기에 빼앗겼던 사보이아를 되찾게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 왕위까지 얻으며 유럽 정치 무대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습니다. 한편 토리노의 패배는 프랑스에게 이탈리아 방면에서의 영향력 상실을 의미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Lionel Marquis – 샤토 드 베르사유 매거진 기사 기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