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비잔틴 제국에도 전체주의가 있었나?

미국 역사가들은 저술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런데 다마스쿠스의 헤라클레이데스가 남긴 기록서를 읽다 보면, 어쩐지 소련이 연상된다.

비잔틴 제국에도 전체주의가 있었나?

콘스탄티노플, 전체주의 국가의 수도였을까?

두 성직자의 격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440년대 말, 두 종교 지도자 사이의 치열한 신학 논쟁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한쪽은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수도원장(아르키만드리트) 유티케스였고, 다른 쪽은 도릴레움 주교 에우세비우스였다. 몇 해 전만 해도 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수도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네스토리우스파로 유명한 바로 그 인물이다)를 축출했었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새로운 교리 논쟁과 개인적 갈등으로 갈라섰다.

여기서 신학적 쟁점까지 깊이 파고들면 지루해질 테니 간단히만 짚고 넘어가자. 유티케스 입장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너무 온건하게 처리되었다고 여겨졌고, 에우세비우스는 보다 절제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사실 교리보다 성격이 더 중요한 변수였다. 최근 해외에서 출간된 『예수 전쟁(Jesus Wars)』의 저자 필립 젠킨스는 유티케스를 이렇게 소개한다.

"그는 교회 내 위치를 (...) 부분적으로 웅변 능력 덕분에 얻었지만, 이 재능이 반드시 축복만은 아니었다. 이 대수도원장은 논쟁에서 물러설 줄 모르는 완강한 스타일, 날카로운 성격, 그리고 모든 비판자를 악마의 조력자나 다름없는 사악한 자로 규정하려는 경향으로 특징지어진다."

비잔틴 경찰 국가

그렇다면 이 고대의 신앙 원칙 논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학자들의 강당에서, 길고 긴 회의 자리에서, 함께 드린 기도 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유티케스는 수도사들을 거리로 내몰아 이미 위축되어 있던 총대주교 플라비아노스를 고함치게 했다. 그는 비판자들을 개별적으로, 때로는 일괄적으로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수도는 급속히 그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이것으로 상황이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젠킨스에 따르면 서기 447~448년 콘스탄티노플에는 마치 경찰 국가에서나 볼 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당대의 사료인 다마스쿠스의 헤라클레이데스의 기록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유티케스와 그 추종자들은] 어떤 이들은 배 위에서, 어떤 이들은 거리에서, 또 어떤 이들은 집에서, 혹은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무릎 꿇은 채 살해했다. 또 다른 이들은 도망치도록 쫓겨났다. 그들은 온갖 열정으로 동굴과 땅속 구멍에 숨은 자들을 샅샅이 찾아냈다. 플라비아노스의 추종자와 말을 섞는 자에게는 큰 두려움이 따랐다. 이웃에 사는 자들이 감시하고, 누가 플라비아노스에게 갔는지 지켜보는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식' 에페소스 공의회

비잔틴 제국에도 전체주의가 있었나?

총대주교 플라비아노스. '강도 공의회'의 희생자. 반면 유티케스의 초상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비슷한 테러 체계가 같은 시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서기 449년 에페소스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유티케스는 의심할 여지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참석자들은 협박당했고, 유티케스에 복종하는 수도사들은 반항하는 이들을 구타했으며, 실제 진행 과정을 기록하려던 '반대파'들은 손가락이 부러지는 고통을 당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플라비아노스는 아무 재판 없이 감금된 끝에 구타를 받고 사망했다. 에우세비우스 역시 자유를 빼앗겼지만 탈출에 성해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어떻게 130명이 넘는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공의회에 서명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흔히 '스탈린식'이라 불릴 만한 수법이 동원되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유티케스에 복종하는 수도사들과 병사들이 주교들에게 백지 문서에 서명하게 한 뒤, 나중에 내용을 덧붙였다고 한다.

2년 뒤 열린 다음 공의회(451년)의 기록에는 이 지도자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 우리는 백지에 서명했습니다. 구타를 당하며 (...) 서명했습니다. 직위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협박받았습니다. 유배될 것이라고 위협받았습니다. 몽둥이와 칼을 든 병사들이 우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폭력배와 이데올로그

에페소스 공의회의 모든 결정은 2년 후 모두 무효화되었고, 공의회 자체는 교회사에서 삭제된 채 경멸조로 '강도 공의회(Latrocinium)'라 불리게 되었다. 유티케스와 그가 연 희대의 악역도 잊혀져 갔다. 기독교사의 이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필립 젠킨스가 저서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이 책은 곧 폴란드에서 벨로나(Bellona) 출판사를 통해 출간될 예정이다.

저자야 전문가인 만큼 종교적인 부분은 그의 판단에 맡기자. 나는 오히려 유티케스와 그 유류(類流)가 만들어낸 시스템 전체가 더 흥미롭다. 격분한 군중, 카리스마 있는 웅변가(유티케스), 이데올로기에 미친 광신적 지지자들(수도사들), 여기에 비밀 요원과 밀정의 군단, 가차 없는 정치적 암살, 재판 없는 처형까지.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과연 20세기에만 들어맞는 단어일까, 아니면 5세기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유티케스를 20세기의 독재자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참고 자료

  • Philip Jenkins, Jesus Wars: How Four Patriarchs, Three Queens, and Two Emperors Decided What Christians Would Believe for the Next 1,500 Years, HarperOne, 2010 (곧 폴란드어판 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