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그가 자라난 후
공자가 태어난 집안은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경 중국 북방을 다스리던 왕조)의 몰락한 방계 혈통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공자 본인이 스스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죠. 여러 세대에 걸쳐 가문은 크게 몰락해 구성원들은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고, 흔한 성씨인 '콩(Kong, 孔)'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학식과 행정 능력으로 명성을 얻으며 존중받았습니다. 그러다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이러한 전통을 깨뜨립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군인으로서 커리어를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힘과 용기, 무용으로 수차례 칭찬을 받았는데, 기원전 562년 반란 도시 포위전 당시 왕실군에서 복무하며 그 진가를 드러냈습니다. 당시 숙량흘은 방비되지 않은 성문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은 분대에 속해 있었는데, 사실 그 문은 수비군이 설치한 함정이었습니다. 병사들의 등 뒤로 격문이 떨어져 퇴로를 끊으려던 것이죠. 숙량흘은 마지막 순간에야 상황을 파악하고 검을 내려놓은 채 떨어지는 격문을 버텨냈고, 덕분에 동료들이 모두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이 영웅적인 활약 덕분에 그는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었고, 이것이 그의 군 경력의 정점이 되었습니다. 마침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숙량흘은 이미 50세를 넘겨 전투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아홉 딸만으로는… 제사를 지낼 아들이 없다니!
그러나 용감한 군인에게도 골치 아픈 미래가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결혼한 아내는 아홉 딸을 낳았을 뿐(당시 전통상 딸은 남편 가문의 소유로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중국 사료에 '불구자'로 기록된 아들을 하나 낳았을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아내는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숙량흘은 조만간 조상들에게 올릴 제사도,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을 위한 제사도 지낼 사람이 없어질까 걱정했습니다. 건강한 남계 후계자를 최대한 빨리 얻어야 했습니다.
숙량흘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젊고 건강하여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안겨줄 두 번째 아내를 얻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그가 살던 곳 근처에는 옌(Yan, 顏)씨 가문의 집이 있었고, 그곳에는 세 명의 적임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야합'의 결실? 믿기 어려운 이야기
미래의 공자 아버지는 장차 자신의 대를 이을 아이의 어머니가 될 후보를 찾아 이웃집을 방문했습니다. 참으로 낭만적이네요! 짐작하시겠지만, 급작스러운 결혼과 남자 아이 잇따라 출산이라는 전망에 후보 처녀들이 크게 열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때 그녀들의 아버지 옌 씨가 숙량흘을 도왔습니다. 그는 딸들에게 이 결혼을 바란다고 밝히며, 콩 선생은 귀족 혈통의 훌륭한 조상을 두었고 눈부신 군인 경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건방진 콩 부인
숙량흘의 청혼과 아버지의 설득은 세 처녀를 크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두 언니들은 신중하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나 막내는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어차피 아버지가 결정할 것인데 굳이 우리 중 누가 이웃과 결혼하고 싶은지 묻느냐며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이 소녀의 이름은 정재(徵在)로, '입이 험하고 건방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그녀가 콩 부인이 되었습니다.
숙량흘의 친척들은 그의 재혼 소식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부 간의 엄청난 나이 차이 때문에 이 관계는 단순히 '야합(야외의 결합)', 혹은 '야만적인 관계'라고 불렸습니다.
숙량흘은 정재의 매력을 누릴 시간이 몇 년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여인은 아들을 낳았는데(아이는 '둘째 아들'이라는 뜻의 중니(仲尼)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를 공자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세 살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어린 공자와 그의 어머니는 숙량흘의 장례식에 초대받지도 못했습니다. 소년은 특별한 사치 없이, 아버지의 첫째 아내와 그 가문의 배제 속에서 자랐지만 교육의 기회까지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출처:
- J. Clements, 『공자(Confucius)』, Erica Publishing Institute, 바르샤바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