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조건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손대기조차 싫어하는 것을 먹고살았지요. 수천 명의 폴란드 아이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오늘날 점령기 아래에서 쌓아 올린 그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바로잡을 때입니다.
전쟁 중 고기는 구하기 어려운 귀한 상품이었지만, 염소는 애초에 도축용으로 사육되는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염소고기는 종종 양고기에 비유되곤 하지만, 나이 든 개체에서 얻은 고기는 분명 미식가, 혹은 괴인을 위한 맛이었죠.
염소의 진짜 임무는 젖을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염소는 폴란드인뿐 아니라 점령자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역사학자 체스와프 우차크(Czesław Łuczak)는 저서 『나치 독일의 점령 폴란드 인구·경제 정책』에서 1940년 독일 당국이 제국(라이히)에 편입된 폴란드 땅에 무려 5만 마리의 염소를 들여올 계획을 세웠다고 기록합니다.

바르텐란트(Wartheland) 지역에서 염소 개체수는 점령 기간 내내 꾸준히 늘었습니다. 전쟁 직전인 1937년에는 약 16만 마리였으나, 1941년 12월까지 1만 5천 마리가 더 늘었고, 2년 뒤에는 총 23만 5천 마리에 이르렀습니다.
만능 가축
염소는 등록과 표시(낙인)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점령군의 눈을 피해 몰래 거래하기에도 욀이했습니다.

전쟁 중 염소는 거의 사치품이나 다름없었습니다(사진 출처: CC BY-SA 4.0, Melisa Banchero).
게다가 염소젖은 소젖과 달리 집유장에 강제로 납부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흔히 '가난한 이의 젖소'라 불린 염소는 이런 점에서 점령기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죠.
사육자들에게 또 하나의 축복은 바로 염소의 입맛이었습니다. 까다롭지 않아 점령기의 어떤 궁핍한 식단에도 잘 적응했습니다. 이 모든 조건이 염소를 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견디기에 완벽한 가축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바르샤바의 엔지니어 시메온 수르기에비치(Symeon Surgiewicz)는 1939년 7월, 자신이 살던 집 마당에 염소 한 마리를 들여 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리지 않는 주인
너비 20미터, 길이 50미터의 널찍한 마당은 닭 열 마리와 뿔 달린 젖 짜는 가축 한 마리를 키우기에 충분했습니다.
마당에는 꽃과 채소, 과일나무가 자랐습니다. 탐식적이고 잡식적인 동물인 염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낙원이었죠.
수르기에비치의 회상에 따르면 그 염소는 빗자루를 통째로 먹어 치우고 창살문을 갉아먹을 정도로 사나웠고, 과일나무의 어린 가지는 말할 것도 없는 붉은 털의 버릇없는 가축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가지야말로 그녀의 최고 별미였죠. 주인들은 이런 행동마다 야단을 쳤지만, 동시에 그녀를 무척 아꼈습니다.

아름다운 빌뉴스, 빌리야 강변, 게디미나스 탑 아래에서 염소가 방목되었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사진 출처: CC BY-SA 2.0, Bernt Rostad).
어쨌든 염소는 점령 내내 그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될 칼슘의 원천이었습니다. 덕분에 염소는 뒷마당을 배회하던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위 서열에 놓였습니다.
부의 척도가 된 염소
수르기에비치가 살던 바르샤바 교외에서는 염소를 한 마리 두는 것이 곧 신분 상승을 의미했습니다. 점점 가치를 잃어가던 지폐보다 훨씬 중요한 자산이었죠.
마치 중세로의 회귀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부는 다시금 '뿔'로 환산되었으니까요. 일기 작성자 자신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기서는 시민 열 명 중 하나가 염소를 키웠다." 즉, 이 동네가 번영하여 염소젖이 흘러넘친다는 뜻이다.
이 점령기의 꿀 같은 우유의 효능은 전국 다른 지역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점령기를 십 대로 보낸 빌뉴스 출신 게노베파 흐이친스카(Genowefa Chyczyńska)는 과외로 벌은 돈을 염소젖 값으로 어머니에게 건넸다고 회상합니다.
젖값으로 10마르크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우리는 한 주인에게서… 염소젖을 받았습니다. 네리스 강가에 사는 리투아니아 여인 카세이비스와 부인이 염소를 쳤는데, 그 냄새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죠! 역겨웠지만 우유는 건강에 좋았고, 그 덕에 우리가 그 시절 빈혈과 구루병을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은 마을에서도, 특히 형편이 가장 빠듯한 농가에서는 염소가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소를 먹일 땅이 부족해 소를 키울 수 없었던 농부들은 말썽꾸러기에 시끄럽지만, 동시에 더 저렴하고 관리가 덜 필요한 대안을 택했던 것이죠.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염소 젖 짜는 농부」(퍼블릭 도메인).
많은 가정에게 염소는 그야말로 핵심 투자였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우유를 제대로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집 염소뿐이었으니까요. 이 문제로 이웃에게 기대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웃들도 남는 젖이 드물었고, 설령 있더라도 헐값에 내주기보다는 팔아치우는 편이었죠. 소젖에는 공식적인 제한도 따랐습니다.
가축 한 마리당 주인은 할당량에 따라 낙농장에 일정량의 우유를 납부해야 했습니다.
그 시절의 기록에는 매일 집에서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수거 지점까지 젖통을 들고 가야 했다는 기억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염소 주인들만은 이런 걱정과는 무관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주방에서 본 점령기(Okupacja od Kuchni)』는 불법 돼지 도축이 아우슈비츠행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연립주택 마당에서 채소를 길렀으며, 다 쓴 커피 찌꺼기가 암시장에서 거래되던 시절을 생생하게 그려낸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1939~1945년의 오리지널 레시피와 실용적인 생존 요령이 가득한 놀라운 요리책이기도 하죠.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