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인 지주이자 지역 사회·문화 활동의 조직가. 크레시(Kresy) 땅에 당대로서는 전례 없는 선진 농법을 도입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입니다. 오늘은 '아우슈비츠 자원 입소자'로 불린 그 대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면을 소개합니다.
필레츠키 가문이 소유한 수쿠르체(Sukurcze) 영지는 빌뉴스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19세기부터 가문의 손에 넘어온 이 땅은 1월 봉기(1863년) 이후 꾸준히 낙후되어 갔다. 그러나 비톨트 필레츠키가 영지 살리기에 나서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훗날 '아우슈비츠 자원 입소자'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 그는 이미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폴란드-볼셰비크 전쟁(1919~1921) 동안 훌륭한 무공을 세웠으며, 두 차례나 수여된 용맹십자장이 그 증거다. 제대 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빌뉴스의 스테판 바토리 대학교 미술학부에 진학했지만, 가문 영지 위로 걷히는 어두운 구름을 보고 학업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성실한 노동으로 흥하다
돌아갈 당시는 마지막 골든타임이었다. 아버지 율리안(Julian)이 영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1920년대 초반에는 영지를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임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긴 법정 공방 끝에 1926년 마침내 불리한 계약을 파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야 비톨트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3세의 비톨트 필레츠키 (출처: 안제이 필레츠키 개인 아카이브)
아들 안제이 필레츠키는 『필레츠키,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서』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버지가 영지를 물려받았을 때 이곳 백성들의 삶은 완전히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서 그 낙후된 농장을 보석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수쿠르체를 정성껏 가꿨습니다. 소유주의 아들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필요한 교육이 부족함을 자각한 그는 포즈난 대학교 농림학부에 통신 과정으로 등록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날수록 집안 서재에는 최신 농법을 다룬 책들이 하나둘 늘어갔고, 그 결과 수확량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수쿠르체 저택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필레츠키 가족. 필레츠키 가문이 떠나야 했던 이 세상은 오늘날 텅 빈 들판일 뿐이다 (출처: 안제이 필레츠키 개인 아카이브)
자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비톨트는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타고난 사회 활동가답게 그는 농업순회강습회 협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지역 주민들을 위한 강의를 직접 열어 배운 지식을 아낌없이 나눴다. 그 효과는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안제이 필레츠키는 이렇게 강조한다.
"몇 년간의 활동 동안 아버지가 이 지역에서 해낸 일은 작은 혁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원래 모든 새로운 것이 크레시 지방에 닿기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폴란드와 폴란드 중부의 현대적 농사법을 그대로 옮기려 애썼습니다. 윤작 체계, 8구획 경작법 같은 것들은 그전까지 들어본 사람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크레시 주민들은 대개 이런 새로운 소식에 의심을 품곤 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필레츠키는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이웃들의 신뢰를 얻어냈다. 게다가 그는 착취와 불의를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다. 지역 농가들 사이의 과당경쟁이 그들의 소중한 노동 결실을 헐값에 팔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로 결심했다.
단결이 곧 힘이다
이렇게 해서 유제품 협동조합 설립 구상이 탄생했다. 협동조합은 농민들에게 농산물을 더 높은 값에 사들인 뒤, 하나의 큰 거래 주체로서 유리한 조건으로 재판매 계약을 협상했다. 안제이 필레츠키의 말처럼 "모두가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협동조합은 성장했고, 그 생산품은 리다(Lida)와 노보그루데크(Nowogródek)는 물론 빌뉴스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리다에서 열린 소방 훈련 과정. 비톨트 필레츠키는 이웃들과 함께 소방대도 창설했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협동조합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지주는 이웃들과 함께 농업 클럽과 소방대를 설립했는데, 당시 국경 지방에서 이는 실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흐마토비치(Achmatowicz) 중위와 함께 리다 군(Lidzki poviat)에서 기마 군사훈련대, 즉 크라쿠프 기병 중대를 조직했다.
안제이 필레츠키가 강조하듯, 아버지는 이 부대의 유지에 많은 돈을 썼는데, 지역 농민들의 아들들은 필요한 장비를 마련할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비톨트는 중대 훈련에도 직접 참여했는데, "그 덕분에 그는 리다 군에서 가장 뛰어난 기병이 되었고, 수많은 경연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말을 타고 리다의 군사 퍼레이드를 이끄는 비톨트 필레츠키. 사진과 캡션은 책 『필레츠키,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서』에서 가져왔다.
이런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 될 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특권을 누린 적이 없는, 여전히 겸손하고 규율 있는 사람이었다.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다른 이들과 나누었다.
이 모든 것이 1939년 9월에 결실을 맺었다. 소련군이 진주한 뒤에도 지역 주민들은 '지주'를 몰아붙이라는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지역 농민들은 비톨트의 오랜 노력과 헌신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출처:
미로스와프 크시슈코프스키(Mirosław Krzyszkowski), 보그단 바슈틸(Bogdan Wasztyl), 『필레츠키,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서』(Pilecki. Śladami ojca), Znak Horyzont, 크라쿠프, 2015.